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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체포권 없는 경찰…한인 피살 60% 용의자도 못 밝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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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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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 현지 경찰관이 지난달 3일 빈민가를 순찰하고 있다. 유흥가 밀집 지역 인근인데도 폐쇄회로TV가 한 대도 없다. [마닐라=오종택 기자]

2013년 2월 5일 한국 교민 서모(42)씨가 필리핀 세부의 해변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09년부터 필리핀에 머물며 여행사를 운영했던 서씨는 발견 전날 지인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진 뒤 실종됐다.

필리핀 ‘K크라임’ 현장을 가다 <하> 현지 수사 돕는 한국

사건 발생 3년이 지났지만 서씨가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는 것 외에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다. 현장 주변엔 폐쇄회로TV(CCTV)도, 목격자도 없었다. 사망 장소조차 오리무중이다.

 본지가 경찰청·외교부에서 입수한 자료를 바탕으로 2013년 이후 발생한 필리핀 한인 피살사건 30건(34명)을 전수조사한 결과 용의자를 한 명도 검거하지 못한 사건이 18건(60%)이나 됐다. 이 중 용의자를 아예 특정조차 못한 사건도 11건(37%)으로 조사됐다.

 현지 전문가들은 결정적 증거가 새로 나오지 않는 한 한인 피살사건 대부분이 ‘콜드케이스(장기 미제사건·cold case)’로 분류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필리핀 내 수사 환경이 열악하고 경찰 수사 역량도 떨어져서다.

 더 큰 문제는 증거가 확보돼 용의자를 특정하더라도 수사 및 사법기관의 부패와 부실이 심각해 처벌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앙헬레스 코리안데스크의 담당관 이지훈(33) 경감은 “현지 경찰들은 ‘내가 돈 안 받으면 검찰이 받고, 검찰이 안 받으면 판사가 돈을 받고 풀어 준다. 안 받으면 결국 나만 손해 아니냐’는 말을 자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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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는 긴급체포해 48시간 조사토록 하는 제도 자체가 없다. 현행범으로 체포하거나 명확한 증거를 갖고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으면 유력한 용의자라도 신병 확보가 어렵다. 판사 수가 부족하고 구속 요건도 까다로워 구속영장 발부까지 1년 이상 걸리는 경우도 흔하다.

박용증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치안영사는 “범인을 검거해 엄한 처벌을 해야 ‘한국인을 살해하면 반드시 잡힌다’는 학습효과가 생기고, 그래야 범죄 재발을 막을 수 있는데 그게 안 된다”고 말했다.

 허술한 수사체계 때문에 억울한 사례도 발생한다. 2013년 2월 지인 소개로 필리핀의 신학교에서 3개월간 체류한 한국인 이연호 목사는 자신이 머물렀던 신학교가 학생들을 기숙사 건축공사에 투입시키며 학대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한 사건에 휘말렸다. 단기 체류자였음에도 신학교 관계자로 오인돼 필리핀 감옥에 수감됐다.

홍덕기 주필리핀 한국대사관 치안영사는 “이 목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감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우리 입장에선 이해하기 힘들지만 이런 황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필리핀 현지 르포
① "총 구할 수 있겠나" 묻자 20분 만에 은색 권총
② 골프·도박·성매매 찾아 몰려든 욕망...‘크리미널 코리안‘
③ 칠성파 부두목, 아이 돌잔치에 '어깨' 100명 우르르



 경찰이 필리핀에 코리안데스크를 설치·운영하며 2012년부터 한국 경찰관을 파견한 배경이다. 경찰은 또 2018년까지 75억원을 들여 수사차량·오토바이 등 장비를 필리핀 경찰에 지원한다.

일정 부분 성과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바탕가스주에서 발생한 교민 조모(당시 56세)씨 피살사건은 한국 전문수사관들이 CCTV 정밀 분석과 프로파일링을 통해 범행차량을 특정했다. 또 수사 방향을 단순 강도가 아닌 청부살해로 돌려놓았다.

현지 경찰은 조씨와 혼인 무효소송을 진행 중이었던 필리핀인 부인 E(51)를 배후로 판단하고 수사 중이다.

마닐라·앙헬레스(필리핀)=윤정민·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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