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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는 국왕 앞에 드리운 어머니 장희빈의 그림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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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1 면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내에 있다. 왼쪽으로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능이 보인다. 인원왕후는 원래 소론가였으나 남편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다.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한다는 인원왕후의 수찰을 받아 쿠데타의 안전판으로 삼으려 했다. -사진가 권태균-

【총평】


왕조 국가의 가장 중요한 헌정 질서는 왕권 계승의 예측성과 투명성이다. 갓 태어난 왕자가 원자(元子)가 되거나 세자(世子)로 책봉되면 차기 국왕으로 결정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론은 이런 헌정 질서를 부인하고 자당이 지지하는 인물을 국왕으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숙종 때 집권한 남인은 서인의 관직 진출을 허용하여 남인의 우세 속에 서인이 공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은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당파의 공존 방식 대신 붕당을 자주 교체했다.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득세한 가운데 즉위한 숙종은 집권 당파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는 붕당 간 연합이나 공존보다는 국왕이 중심이 되어 정국을 운영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정파 간의 대립이 심화되어 환국이 일어났다.

김일경 단소(壇所:시신 없이 고인을 기리는 특별한 장소). 경북 예천군 감천면 내성천 근처에 있다. 김일경은 노론 4대신을 4흉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를 올려 정권을 장악했으나 영조가 즉위하면서 사형당하게 된다. -사진가 권태균-

서인은 희빈 장씨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정권에서 밀려 났다. 이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처형당했다(기사환국).


장희빈이 인현 왕후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게 되고, 인현 왕후가 다시 왕후의 자리를 되찾게 되면서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갑술환국).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집권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후 노론과 소론이 연합한 가운데 노론이 정국을 운영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에 소론은 일부 남인과 합세하여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그가 병약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복동생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요구했다. 소론은 이를 빌미로 노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아 제거했다(신임사화).

경종의 초상 장희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부터 서인(노론)의 격렬한 반감을 사다가 36세에 급서해 독살당했다는 설이 무성했다. 초상화에 먹물이 스며든 것은 독살설을 암시한다. 경종의 초상은 전해지는 게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의 초상화와 장희빈의 외모에 관한 각종 기록을 참조해 그린 것이다. -우승우(한국화가)-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났다. 왕이 환국을 주도함에 따라 왕과 직결된 외척이나 종친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고, 당파의 이익을 대변했던 3사와 이조 전랑의 비중은 줄어들게 되었다. 정치 권력이 고위 관리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고위 관리들이 주도하는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양반 사이에서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권력을 잡은 일부 양반을 제외하고 다수 양반은 몰락하게 되었다.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향촌 사회에서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향반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집안 세력이나 살림이 아주 보잘것없어진 잔반이 되기도 했다.


사림은 족보를 편찬하여 성리학 중심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족보는 가문의 내력을 기록한 것으로 안으로는 종족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밖으로는 다른 집안이나 하급 신분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가지게 했다. 이는 혼인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사림은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향약을 만들어 군현 등을 단위로 시행했으며, 향촌 사회 양반의 명단인 향안을 작성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지방 양반들은 자치 기구인 향회를 조직하여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했다.

향안 등록 여부에 대한 회의 결과 (이미지 출처: 지학사 한국사)남원의 어느 마을에서 향안 등록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 결과를 기록한 것이다. 향안에 이름을 올리려면 향회의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만 했다.

한편, 양반처럼 관직에 진출하고 싶거나 군역을 면제받고 싶은 사람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신분을 속여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욱 점점 많아졌다. 농업 경영으로 부농이 된 농민들이나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크게 성장한 상인과 독립 수공업자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없었으므로 재력을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꾀했다. 이들은 양반이 되기 위해 정부에 납속하거나 공명첩을 사들이기도 했지만, 족보를 사거나 위조하는 편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양반은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촌락 단위로 동약을 조직함에 따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과 사우(祠宇)가 많이 세워졌다. 사우는 교육 기능이 있는 서원과는 달리 가문의 이름 있는 인물에 대해 제사만 지내는 기능을 가졌다. 양반 신분을 나타내는 청금록(靑衿錄) 과 향안은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중요한 증거 서류 역할을 했다.


향반 혹은 잔반이라 불린 몰락한 양반 중에는 소작이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향촌을 지배했던 양반은 새로 성장한 부농층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부농층들은 수령을 중심으로 한 관권과 결탁하여 향안에 이름을 올리고, 향회를 장악하여 영향력을 키우려 했다. 이들은 종래의 재지사족을 대신하여 정부의 부세 제도 운영에 참여했고, 향임직에도 진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 양반층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구향인 사족층과 신향인 부농, 서얼, 중인층은 향촌 사회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였는데, 이를 향전(鄕戰)이라고 한다.???

경종의 친필. ‘경(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주역』 곤괘(坤卦) ‘문언전(文言傳)’의 효사(爻辭)를 풀이한 글이다.

조선 후기 향촌 사회에서는 사족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수령과 향리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향회는 지방 양반의 이익을 대변하던 자치 기구에서 수령의 부세 자문 기구로 성격이 변했다. 이는 세도 정치 시기에 정치 기강이 무너지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 수령과 향리가 농민들을 수탈하는 배경이 되었다.

경종이 묻힌 의릉.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1962년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가 이곳에 들어서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제한되고 원형이 많이 훼손됐다. 95년 안기부가 옮겨 간 뒤 다시 일반에게 공개됐다. -사진가 권태균-


【핵심 키워드】


☞ 서인은 희빈 장씨 소생의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다 정권에서 밀려 났다([기사환국]). 인현 왕후가 왕후의 자리를 되찾게 되면서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갑술환국]).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이복동생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요구했다. 소론은 노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아 제거했다([신임사화]). 정권에서 밀려난 양반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향반]이 되거나 몰락하여 [잔반]이 되기도 했다.


사림은 [향약]을 만들어 군현 등을 단위로 시행했으며, 향촌 사회 양반의 명단인 [향안]을 작성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지방 양반들은 자치 기구인 [향회]를 조직하여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했다. 양반이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촌락 단위로 동약을 조직함에 따라 전국에 많은 동족 마을이 만들어지고, 문중을 중심으로 서원과 사우(祠宇)가 많이 세워졌다. 양반 신분을 나타내는 [청금록(靑衿錄)] 과 향안은 향촌 자치 기구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중요한 증거 서류 역할을 했다.


구향인 사족층과 신향인 부농, 서얼, 중인층은 향촌 사회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였는데, 이를 향전(鄕戰)이라고 한다. ☜


【예상 문제】


?1.?다음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꾸며 본 어느 왕의 회고록의 일부이다. 이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갑술년에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정권을 담당했던 [가]는(은) 이를 계기로 반대파를 제거하려 하였다.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나는 도리어 그들을 물리치고 [나]를(을) 등용했다. 등용된 이들은 이전 집권 세력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다]와(과)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에 선 [라](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웠다.


나는 본래 관료들의 인사 관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탕평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당파가 일거에 몰락하고 다른 당파가 정권을 독차지하는 격변이 발생하여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위 회고록에 기록될 수 있는 내용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리하였다.

ㄴ.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였다.

ㄷ. 청나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윤휴는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 ㄹ. 대표를 보내 청나라 관리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하였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09학년도 6월 모의평가 17번

?** 29회 " 삼종(三宗)의 혈맥 ① 숙종 2 - 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편 문제 5번


?


2.?밑줄 친 부분에 언급된 정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상황으로 옳은 것은?


당파의 습성이 고질화되어 손 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성상께서는 이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이쪽만을 등용하였고, 저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다시 저쪽만을 등용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선왕(先王) 초기까지도 당파가 여전히 싸움을 일삼아 엉킨 감정을 풀기 어려웠다. 이에 선왕이 탕평책의 정사를 행하여 후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조선왕조실록-


① 주화론과 주전론이 대립하면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② 노론과 소론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④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 2007학년도 6월 모의평가 17번

** 29회 " 삼종(三宗)의 혈맥 ① 숙종 2 - 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편 문제 6번


?


3. (가)~(라)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가) -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었다.


ㄴ. (나) - 서인과 남인이 예송 논쟁을 벌였다.


ㄷ. (다) - 집권 붕당이 북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ㄹ. (라) - 산림이 부정되고 이조 전랑의 권한이 약화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13년 7월 학력평가 11번

?** 23회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① 인조 - 국익 위에 당론, 전란을 부르다 " 편 문제 4번


?


4.?다음 가상 대화가 있었던 시기의 국왕이 추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①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육성하였다.


② 민생 안정을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③ 금위영을 설치하여 5군영 체제를 갖추었다.


④ 세도 정치로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⑤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였다.

?* 2001학년도 수능 13번


?


5.?다음 밑줄 친 ‘국왕’과 관련된 사실로 옳은 것은?


국왕은 붕당을 없애자는 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조 전랑이 삼사의 고나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마저 없애 버렸다. 그 결과 사색(四色)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옛날부터 저마다 지켜 온 의리는 쓸모 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사문(斯文 : 유학)을 위한 시비(是非)와 국가에 대한 충역(忠逆)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렸다.


① 소수의 세도 가문 출신이 중앙 정치를 주도했다.


② 균역법을 실시하자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시행했다.


③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다.


④ 재정 수입 증대와 상공업 진흥을 위해 자유 상업을 허락했다.


⑤ 초계문신제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했다.

?* 2008학년도 9월 모의평가 15번


?


6.?다음 사료에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국왕이 취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붕당의 폐해가 지금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예법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한족이 다른 쪽을 역적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 … (중략) …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재도 그리 많은 것이 아닌데, 근래에 들어 인재를 등용할 때 같은 붕당의 인사들만 고용하려고 한다. 조정의 대신들이 서로 상대당을 공격하면서 반역인가 아닌가로 문제를 집중하니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책이 나오지 못하고,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 영조실록 -


① 몇몇 세도 가문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운영하였다.


② 붕당을 혁파하고 근대적인 의회 정치를 추구하였다.


③ 산림(山林)을 등용하여 붕당 간의 균형을 도모하였다.


④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여 붕당 간의 갈등을 완화하였다.


⑤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


【정답 및 해설】


1. 해설 : 정답 ⑤


제시된 자료에는 환국 발생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이 회고록의 주인공이 숙종임을 알 수 있다.


⑤ ㄷ. 숙종 시기 소론이었던 윤휴가 주장한 내용이다. 윤휴는 노론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지목당한 바 있다. ㄹ.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


2. 해설 : 정답 ②


제시된 자료는 숙종에 의해 단행되었던 환국에 대한 설명이다.


② 숙종 때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다.


?


3. 해설 : 정답 ④


ㄴ. 예송 논쟁은 현종 때의 일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심화된 사건이다.


ㄹ. 영조는 산림의 존재를 부정하며 이조 전랑이 가지고 있던 관리 선발 관행을 폐지하였다. 천거권 자체는 정조때 폐지되었다.

<오답 풀이>


ㄱ.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된 것은 선조 때의 일이다. (가) 이전 상황이다.


ㄷ. 인조반정 관련 내용이다. (나) 시기의 일이다.


?


4. 해설 : 정답 ②


② 영조는 민생 안정을 위해 균역법을 실시했다. 국가 재정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결작과 선무군고나포를 징수하고, 어장세와 염세, 선박세를 부과했다.

<오답 풀이>


① 장용영은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육성한 친위부대이다.


③ 금위영을 설치한 왕은 숙종이다.


④ 대원군과 관련된 내용이다.


⑤ 정조가 지방 사족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추진한 정책이다.


?


5. 해설 : 정답 ②


② 이조 전랑의 삼사 관리 선발권은 원래 숙종 때 폐지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관행이 남아 있었는데, 영조가 이러한 관행을 없앤 것이다.


?


6. 해설 : 정답 ⑤


제시된 자료는 붕당의 폐해가 심각하여 일당 전제화가 만연된 상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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