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북 문제에 유연성 잃지 말아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23일(현지시간)로 예정된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의 미국 방문에서는 북핵 문제 해법이 깊숙이 논의될 게 틀림없다. 특히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결의가 이달 중 나올 전망이어서 이에 대한 양국 간 교감도 이뤄질 것이다. 그간 중국 역시 북핵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온 터라 양국이 제재 착수에 뜻을 모아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문제는 수위와 폭이다. 누차 강조했듯 북한 교역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의 적극적인 동참 없이는 대북 경제제재는 무용지물이다. 중국은 북한이 완충지대가 아닌 감당 못할 짐이 됐음을 하루빨리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국제사회의 노력에 발맞춰 물샐틈없는 대북 제재에 동참하기 바란다.

미국, 평화협정 논의 조건부 수용해
기존 입장 접고 실리적으로 접근
한국, 대북 철벽 치면 들러리 될 수도

 왕 부장의 방미와 관련,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그가 거론했던 평화협정 문제다. 그는 지난 17일 “한반도의 비핵화 실현과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을 병행 추진하는 협상 방식을 제안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기에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의 외교장관 회담에서 이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는 평화협정 논의란 있을 수 없다는 게 한·미 양국의 일관된 공식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드러난 북·미 간 비공식 접촉의 전말은 우리에게도 새로운 인식과 접근의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1일 “4차 북핵 실험 며칠 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비핵화 전제 원칙을 접고 북한과 평화협정 논의에 은밀히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회담 의제에 비핵화 문제가 포함돼야 한다는 미국 측 요구를 북한이 거부해 무산됐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도 “논의를 먼저 제안한 건 북한”이라고 토를 달았을 뿐 접촉 사실은 시인했다.

 비록 북·미 협상이 불발에 그쳤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비핵화 없이는 대화도 없다”고 외쳐온 오바마 행정부가 뒤로는 북한에도 귀를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란 사태를 해결한 오바마 행정부가 이제 북한 문제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여력이 생긴 것이다.

 북한이 거부해서 그렇지 만약 비핵화 논의 카드를 받았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뉴욕이든, 동남아 모처에서든 북한과 미국 관계자들이 만나 북핵과 평화협정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고 머리를 맞댔을 게다. 우리를 빼고 말이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채 밀실에서 이뤄지는 북·미 간 한반도 논의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위험이 있는 까닭이다.

 이 같은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북한에 대해 철벽을 치고 ‘비핵화 없는 협상 불가’만 외칠 일이 아니다.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란 이름 아래 비핵화 없는 대화 거부를 고수하던 미국마저 필요하면 언제든 전략을 바꿀 수 있음이 이번에 재확인됐다. 정의와 명분보다는 실리와 국익이 우선시되는 곳이 국제사회다. 대북 문제에서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면 우리도 초라한 들러리 신세로 추락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