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빅뱅 때 바리온·암흑물질, 떨어지며 소리파 만들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66호 25면

1 우주 나이 30만 년에 남겨진 바리온 음향 진동의 흔적. 우주배경복사 속의 이 흔적은 오늘날 은하의 분포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주인공은 우승팀 스페인이 아니고 단연 ‘부부젤라’였다. 트럼펫 모양의 플라스틱 악기 말이다. 처음에는 경기가 시작되면서 텔레비전 수신기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지만, 경기 현장의 소음 그대로였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펍에서 경기를 관람할 때는 바로 옆좌석 친구와도 대화가 불가능했다. 이 때 유튜브에는 부부젤라 소음을 제거하고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는 동영상들이 많이 올라왔다. 원리는 간단했다. 들리는 소리를 주파수별로 분리하게 되면, 부부젤라 같은 단순한 소리의 신호를 잡아낼 수 있다. 이것을 제거해 주면 경기 현장의 다른 소리를 그대로 둔 채 소음만 없애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즐겨듣는 모든 음악도 주파수로 분석하면 저음과 고음 영역대의 음원을 어렵지 않게 분리해 낼 수 있다. 만일 고음 영역을 강조하고 싶으면 저음 주파수대를 줄여주면 되고, 저음 영역을 강조하고 싶으면 반대로 해주면 된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음이라면 어떠한 패턴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모양이 나온다. 반면에 우리 귀에 잘 스며드는 음악일수록 주파수 별로 늘어놓았을 때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다양한 악기들이 연주하는 교향곡은 아주 저음 영역부터 고음까지 넓게 이어지는 주파수 공간에서, 순간마다 음악이 수놓는 패턴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도 즐겁다. 이러한 패턴들이 연속으로 이어지면서 우리 귀에 음악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이다.


우주에서도 이러한 교향곡이 연주됐다. 우주는 생명의 씨앗이 잉태했던 초기 급팽창이 끝나는 순간부터 이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 교향곡은 아주 고음부에 해당하는 악기부터 연주를 시작한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가늘게 시작하는 고음의 전주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아니지만, 음악이 시간에 흔적을 남기듯이 우주의 연주는 공간에 그 흔적을 남겼다. 선과 악의 주제가 반복되는 합창 교향곡처럼, 우주의 연주도 빛과 암흑이란 주제에 의해서 형성됐다.


빛, 어둠 그리고 우리(물질)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서로에 대한 구별이 없던 한 곳에 함께 모여 있었다. 바로 원시 플라스마(primordial plasma)다. 급팽창과 함께 세상에 나오게 됐을 때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바리온(Baryon, 양성자와 중성자) 입자는 빛(photon, 광자)과 하나가 돼 있었고, 어둠의 암흑물질(dark matter)은 세상 그 어느 것과도 단절돼 자신들만의 중력계에 머물고 있었다. 이 암흑물질은 바리온을 자신의 중력계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바리온을 둘러싸고 있는 빛은 그 인력에 반발해 바리온을 암흑물질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중력과 압력의 반작용이 진동, 즉 소리파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것이 우주 교향곡의 제 1악장이다. 이 1악장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었던 세상에서, 빛과 어둠과 우리가 구별되기 시작하고, 여기서 빚어지는 갈등으로부터 우리(물질)를 어둠에서 구원하는 빛의 서사시로 끝나게 된다.


제2악장은 텅 빈 공간에서 느린 망각을 주제로 시작한다. 빛과 하나가 된 우리는 암흑물질로부터 멀리 떨어져 텅 빈 공간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는 암흑물질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리온의 꿈 속에서 중력의 유혹을 심어놓을 수 있는 힘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바리온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을 쳤는지 기억이 희미해져 있을 때, 암흑물질은 조금씩 바리온을 다시 어둠의 세계로 인도하기 시작한다. 빛의 힘은 탈출할 때 소모돼 두 번째 유혹에 저항하지 못하고 바리온과 함께 암흑의 중력계로 추락한다. 이 유혹의 주제가 제 2악장에서 연주된다.


 

미국 시카고대 우주물리학자 웨인 후 교수.

교향곡 이름은 ‘바리온 음향 진동’바리온과 암흑물질은 3악장에서 다시 재회하게 된다. 그런데 이 재회를 통해서 유혹받은 자뿐만이 아니고, 유혹한 자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 지난 악장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소모된 힘은 바리온에서 암흑물질로 전이되면서, 어둠의 세계 역시 힘을 상실하고 중력이 약해지게 된다. 모든 것이 다시 한 자리에 모이게 되면 빛은 다시 어둠에 반발하며 바리온을 이끌고 두 번째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이전보다는 힘을 많이 잃었지만, 빛은 바리온을 다시 암흑의 입구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마지막 4악장에서는 빛이 바리온에서 분리되면서 모든 것이 끝난다. 빛이 우리를 가두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가 빛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주가 식으면서 바리온은 더 이상 빛을 붙들어 둘 수가 없게 된다. 세상에 먼저 나온 고음부에서는 빛과 어둠의 주제가 여러 번 반복되면서 소리가 잦아들어져 가고 있고,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저음부에서는 힘찬 빛과 바리온이 첫 번째 탈출하는 주제가 연주되고 있을 때, 엔딩은 갑자기 찾아 온다.


우주 나이 30만 년, 세상의 모든 빛은 바리온을 놓아 두고 자유롭게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하고, 빛을 잃어버린 바리온은 더 이상 암흑의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흡수돼 이제 암흑의 세계와 하나가 된다. 이 암흑의 세계에서 바리온 스스로의 빛을 밝히는 시간이 올 때까지 불이 꺼진 무대처럼 음악은 멈춰 버린다. 여기까지 연주된 우주의 교향곡을 바리온 음향 진동(Baryon Acoustic Oscillation, BAO) 라고 부른다. 이 BAO 교향곡은 그 이후에는 다시 우주에서 연주되지 않았다.

우주배경복사의 비등상 온도 지도에 있는 바리온 음향 진동(BAO) 파도. 초기 남극의 관측기구가 발견한 이 BAO에서 가장 높은 피크가 첫 번째 파도다. 가로축은 빅뱅 이후의 시간. 세로축은 우주배경복사에서의 온도 차이(단위는 100만분의 1도).

오래 전에 멈추어 버린 교향곡은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미국 시카고대 웨인 후(Wayne Hu) 교수는 1990년대 이 BAO 교향곡의 흔적이 우주배경복사(cosmic background radiation)에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우주거대구조의 흔적은 우주배경복사의 온도차이로 나타난다. 들리는 음악을 주파수별로 분리하듯이 이 높고 낮은 온도가 표시된 지도를 진동수별로 분리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먼저 들어온 파도와 BAO 교향곡이 멈추기 직전에 들어왔던 파도를 따로 분리해서 볼 수가 있게 된다. <그림 3>에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곳은 빛과 바리온이 암흑세계로부터 탈출하는 주제가 연주되었던 제 1악장에 해당하는 곳이다. 가장 높은 곳은 바리온이 암흑물질에서 가장 멀리 떨어졌을 때 남긴 흔적이다. 이 고지를 기점으로 다시 내려오는 곳은, 제 2악장의 주제가 연주되는 곳이다. 즉 빛이 힘을 잃고, 바리온은 암흑의 중력을 향해 다시 빨려들어가는 곳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같은 주제가 반복되지만 입자들이 힘을 잃어 아주 약한 파도만을 남기게 된다. 웨인은 이 파형들을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2 우주배경복사와 은하 분포의 비교. 왼쪽부터 137억 년 전, 55억 년 전, 38억 년 전.

2000년경 남극에서는 부메랑(Boomerang), 맥시마(Maxima), 톱해트(Top Hat) 등 흥미있는 우주배경복사 관측 실험이 시도됐다. 관측 실험은 지상에서 풍선기구 위에 관측장비를 얹어놓고 기구를 상승시키는 방식이다. 대략 지상에서 40㎞ 지점까지 올라가게 되면 이 기구는 100여m 정도의 거대 풍선으로 팽창하면서 상승을 멈추게 된다. 이때부터 남극 대륙 주변을 한 달 정도 돌게 되는데, 이 진기한 유영을 하는 동안 풍선 위에 모자처럼 얹혀진 관측장비는 하늘의 우주배경복사 온도차이를 관측할 수 있다. 이 관측으로부터 빛과 바리온이 암흑물질로부터 탈출한 흔적인 첫 번째 파도가 발견된다.


BAO 교향곡에 의해서 만들어진 첫 번째 파도가 실제로 관측된 이후, 그 전곡(全曲)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 전곡을 모두 복원할 수 있는 방법은 우주에서 관측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2004년 윌킨슨 마이크로파 비등방성 탐색기(WMAP)와 2015년 플랑크(Planck) 우주망원경을 통해 우리는 우주교향곡 전곡 복원에 성공했다. 자료를 분석한 결과 BAO 파도의 길이가 대략 5억 광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 파도가 보이는 시차를 이용해 우주의 나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나이 137억 년은 이 BAO 관측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은하 거리 재는 표준자도 얻게 돼인간은 음악을 한 번 듣고 흘려보내지 않고 다양한 레코딩 기법을 이용해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 연주회장 현장에서는 공간의 소리파로 귀에 들려오지만, 기계적인 흔들림이나 디지털화된 신호로 저장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혹시 이 BAO 교향곡도 우주의 어디엔가 다른 형태로 기록돼 있지 않았을까? 2000년대 중반 이러한 아이디어에 착안해, 이 교향곡이 녹음돼 있는 제3의 흔적을 찾는 작업이 본격화됐다.


2000년에는 우주의 숨어 있는 패턴을 연구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많은 은하들을 관측하고 그 지도를 그려나가게 된다. 이 지도에 우리가 알고 있지 못하는 많은 비밀들이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바로 이 은하 지도에 우주 태초의 BAO 교향곡이 보존돼 있었다. 관측된 은하의 분포를 지도로 만들고, 이것을 진동수별로 분리해보면, BAO 파도들이 하나 둘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BAO 파도를 은하의 분포에서 복원하게 되면 은하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표준자를 얻게 된다. 현재 우주의 나이를 포함해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모든 심우주(深宇宙)까지의 거리는 모두 이 BAO에 의해서 나오게 된다. 우리 한국은 이 분야의 발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우주론자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송용선한국천문연구원 선임연구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