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침해 우려 큰데…화학적 거세 기준 주먹구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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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성충동 약물치료(화학적 거세) 대상자 선정의 핵심 기준인 ‘재범위험성 평가 척도’가 본래 전자발찌 부착 대상자 선별용으로 개발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척도에는 성충동 관련 지표가 없다. 타당성이 부족한 이 평가 도구를 시급히 고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자발찌 대상자 기준 그대로 써
약물치료 가능성 등 알 수 없어

검찰은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 명령을 법원에 청구할 때 ‘한국형 성범죄자 재범위험성 평가 척도(KSORAS)’ 결과를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이 척도는 총 15개의 항목별 점수를 더해(29점 만점) 재범위험성을 상·중·하로 구분하도록 돼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통상 13점 이상이 나올 때 화학적 거세 명령을 청구한다”고 말했다.

법원 판결에 따른 첫 화학적 거세 대상자인 A씨도 이 평가에서 13점 이상을 받았다. A씨는 2014년 강제추행 혐의로 징역 2년에 성충동 약물치료 3년이 확정됐다. 출소 두 달 전부터 약물을 투여받는 A씨는 다음달에 출소한다.

2012년 전남 나주에서 초등학생(당시 8세)을 납치해 성폭행한 뒤 목 졸라 살해하려 한 고모(27)씨도 13점을 받았다. 고씨는 2014년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성충동 약물치료 5년이 확정됐다. 이 평가를 통해 화학적 거세 확정 판결을 받은 성범죄자는 현재 16명이다.

하지만 이 평가 척도는 화학적 거세 필요성 판단이 아니라 전자발찌 부착 대상자 선별을 위해 개발됐다. 2008년 8월 법무부의 연구 용역으로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팀이 개발했다.

이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성범죄 고위험군을 골라내 전자발찌를 채워도 인권침해 논쟁이 생기지 않는 척도를 만들어 달라는 법무부 주문에 따라 개발했다. 이것이 성충동 약물치료에 사용된다는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이 평가 도구는 성범죄·폭력범죄의 횟수, 피해자 수 등의 항목으로 구성돼 있다. 비정상적 성적충동의 지속성이나 강도를 평가할 수 있는 항목은 없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윤정숙 박사는 “KSORAS를 성범죄자가 이후 성범죄를 다시 저지를 것인가를 예측하는 평가 기준으로 사용하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KSORAS 는 법원 선고와 화학적 거세의 실제 집행 시점(출소 2개월 전) 차이에서 생기는 문제도 안고 있다. 각각 3점과 2점이 배정된 피의자의 나이와 시설 수용 기간은 검사 시점이 기준이어서 교도소 복역 기간을 포함하지 않는다.

법무부에 따르면 현재 성충동 약물치료 확정자들의 법원 선고부터 집행까지 평균 기간은 9년이다. 따라서 이 척도는 이 기간에 재범위험성이 줄어들 가능성을 반영하지 못한다.

이 교수는 “수감 중 성폭력 치료 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추가적인 생물적 평가 지표가 포함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해 12월 성충동 약물치료에 대한 법원 선고와 집행 간의 차이는 헌법에 맞지 않아 2017년까지 집행 전에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서복현·장혁진 기자 sphjtb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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