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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서 ‘5000명 잔칫상’ 다식·한방차까지 밤샘 준비…시민들 폭우에도 “스바시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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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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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브리지 투 코리아 페스티벌’ 때 한식을 맛보기 위해 줄 선 러시아 시민들. [사진 한윤주]

2014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브리지 투 코리아 페스티벌(Bridge to Korea Festival)’이란 행사가 열렸다. 한·러 상호 방문의 해(2014~2015년)에다 수교 24주년을 맞아 한·러 무비자가 실행된 것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총 사흘간의 행사 중 이틀간 공원에서 시민 5000명에게 한식을 홍보하고 맛보게 하는 임무를 받았다. 하루 2500인분의 음식을 내놓는 것을, 그것도 외국 야외 공원에서 어찌 풀어 가야 할지 막막했다.

한윤주의 좌충우돌 한식 알리기

톨스토이, 차이콥스키, 소련, 캐비아, 백야, 러시아 인형, 크렘린 궁전, 체르노빌, 호두까기 인형…. 그런데 러시아인들의 식탁 풍경은 떠오르지 않았다.

러시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나라이지만 농지는 13%에 불과하고 혹한의 기후이다 보니 농작물이 많지 않다. 여러 인종이 섞여 살고, 식자재와 관련한 거의 모든 품목은 유럽에서 공수하고 있다고 한다.

1991년 소련에서 러시아로 바뀐 뒤 이들은 ‘유럽의 중국인’이라 불리며 소비 및 타 문화 흡수력이 큰 잠재 시장으로 부상했다. 우리 문화와 관광을 적극적으로 알려야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모스크바 중심가의 롯데호텔 측 주방을 행사용 메인 주방으로 정했다. 먼저 음식을 장만한 뒤 냉동·냉장 탑차를 동원해 행사장이 있는 베덴하 공원으로 이동키로 했다. 전체를 한약방 콘셉트의 건강 한방차, 화려한 궁중 채색의 다식 및 떡류, 기원 품은 잔칫상, 역동적인 길거리 음식 등 4개 코너로 기획했다.

행사 전날인 6월 13일, 백야의 밤에 한국 셰프들은 그야말로 ‘하얗게 밤을 지새우며’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준비했다. 침묵과 긴장 속에 도마와 칼이 부닥치고 냄비와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를 지켜보던 러시아 부총주방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흡사 전쟁을 준비하는 눈빛이에요. 어떻게 밤을 새우며 요리할 수 있는지 신기해요.”

아마도 공산권 체제에 익숙했던 그들이기에 우리가 강압 없이 자발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신기했던 것 아닐까. 이에 나도 답했다.

“러시아인들은 올림픽을 준비하며 체육 강국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몇 년을 뛰잖아요. 우리도 한국 음식을 홍보하는 국가대표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랍니다.”

행사 첫날, 대열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시민이 모였다. 대부분 처음 경험하는 한식의 색감과 맛에 감탄사를 내며 ‘스바시바(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몇 시간씩 줄을 서 맛보는 그들에게 우리 또한 진심 어린 ‘감사합니다’로 화답했다.

둘째 날은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곧 폭우로 변했다. 한 시간을 기다려 음식이 준비된 천막으로 들어선 시민들은 추위 탓에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따뜻한 차를 돌리며 온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그들은 우리에게 ‘감사합니다’를, 우리는 그들에게 러시아어로 ‘스바시바’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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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주

어느 60대 남성은 행사가 끝날 무렵 다시 찾아와 러시아어로 뭐라 뭐라 하며 내 손에 군인 훈장을 쥐여 주었다. 극구 사양하다가 하는 수 없이 받은 그 훈장이 우리에겐 러시아 행사를 추억하는, 올림픽 금메달처럼 남아 있다.

한윤주 한식레스토랑 ‘콩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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