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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움직이는 기술이 최고, 아름다운 시계는 말을 걸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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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면

l 까르띠에 무브먼트 책임자 포레스티에

기계식 고급 시계는 슈퍼카의 세계와 많이 닮았다. 스포츠카들이 엔진 성능을 겨루듯 고급 시계업체들은 무브먼트로 경쟁한다. 무브먼트는 기계식 시계를 작동시키는 핵심 구동장치이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 역할을 하는 무브먼트는 아직까지는 ‘남성의 영역’이다. 명품 시계업체에서 무브먼트를 설계하고 창작하는 워치메이커 일은 주로 남자들이 맡고 있다. 프랑스 명품 시계·보석 브랜드 까르띠에의 무브먼트 제작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지난 2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고급시계박람회(SIHH)에서 카롤 포레스티에(사진) 까르띠에 무브먼트 크리에이션 수석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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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무브먼트 책임자 포레스

SIHH는 까르띠에를 비롯해 피아제, 예거 르쿨트르, 바쉐론 콘스탄틴 등 명품 시계 브랜드들이 올해의 신제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까르띠에는 가장 많은 110개의 시계 신제품을 공개했다. 포레스티에 수석이 이끄는 무브먼트 크리에이션팀이 핵심 역할을 했다.

올해의 신제품 110개를 아우르는 테마가 있나.

“우아함(elegance)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보석업체로 시작한 까르띠에는 본래 우아한 스타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올해의 특징은 기술적 기반 위에서 미학적 요소가 더욱 부각됐다는 점이다.”

트렌드를 어떻게 읽는가.

“아니, 우리는 트렌드를 읽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가 트렌드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제시한 스타일을 찾아 고객이 끌려들어오도록 만든다. 물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나가는 건 어려운 일이다. 무브먼트가 시계의 기능과 모양을 결정하는데, 무브먼트 개발에 걸리는 시간이 3~5년이다. 5년 뒤를 내다보고 시계를 만들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담대해야 하며, 창의적이어야 한다.”

무브먼트는 시계 안에 내장돼 있는데,
시계 전체 디자인에도 영향을 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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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시계 제작의 중심지인 라쇼드퐁에 있는 까르띠에 매뉴팩처 내부 모습. 왼쪽은 이곳에서 제작된 기계식 무브먼트이다.

“시계는 작은 틀 안에 구동장치와 디자인이 모두 표현된다. 기능적 요소와 심미적 요소가 같이 어우러질 수 밖에 없다. 기계식 시계는 무브먼트 제작팀과 디자인팀, 이를 구현하는 장인의 기술이 협업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오늘날 고급 시계 회사들은 무브먼트를 자체 개발한다. 까르띠에는 2008년부터 자체 개발을 시작해 현재 48개의 고유 무브먼트를 보유하고 있다. 올해는 3개의 무브먼트를 새로 내놓았다.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은 직업인데,
언제부터 워치메이커를 꿈꿨나.

“워치메이커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아니,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가 모두 워치메이커였다. 시계는 내 삶의 한 부분이었다. 아주 어려서부터 시계를 분해하고 조립하며 시계와 함께 컸다.”

포레스티에 수석은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인 라쇼드퐁에 있는 고급시계학교에서 6년간 시계 제조를 배웠다. 무브먼트 전문 회사를 거치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까르띠에에는 1999년 합류했다. 처음에는 무브먼트 제조·생산으로 시작해 곧 무브먼트 개발 쪽으로 옮겼고, 지금은 책임자가 됐다.

남성의 세계에서 일하는 여성으로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예전에도 무브먼트를 생산하는 자리에는 여성들이 꽤 있었다. 여성들이 좀 더 보수적이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반복적인 일을 하는 자리에 많이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엔지니어 일을 하는 여성은 많지 않았다. 나는 이 일이 재미있어서 시계속에 흠뻑 빠져서 지냈고,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팀원 35명 가운데 5명이 여성이고, 게다가 최고 실력자들이 여성이다.”

유리천정에 맞닿은 적은 없었는지.

“여자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야 할 때가 많았다. 여성은 남성보다 두 배이상 많은 노력을 들여 자기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 까르띠에에서 막 일을 시작했을 때였다. 서플라이어와 미팅을 하는데, 몇 마디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가 내게 ‘어, 스위스 사람이 아니네’라고 했다. 프랑스 파리 출신이라고 말했더니 ‘여자에다가, 파리 사람이라니’라며 혀를 끌끌 찼다. 시계 종주국인 스위스인들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나는 ‘성별뿐 아니라 출신 지역마저 핸디캡이라니, 첩첩산중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극복했는가.

“그 서플라이어는 몇 번이고 나를 시험했다. 얼마나 하는지 보자, 하는 심리였던 것 같다. 그 시험에 열심히 응해줬고, 통과했다. 프랑스 옛말에 ‘거북이 등을 잘 단련시켜야 한다’는 말이 있다. 내 열정이 유리천장보다 뜨거웠다.”

당신에게 아름다운 시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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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제네바 고급시계박람회(SIHH)에서 공개 된 까르띠에 신제품 ‘로통드 드 까르띠에 아스트로미스터리’ 시계. 시계 바늘이 무브먼트에 연결되는 부분을 보이지 않게 처리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마다 미에 관한 기준이 다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계가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 아름다운 시계는 당신에게 말을 건다.”

복잡한 기계식 시계를 찾는 여성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계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본다. 기계에 대해 잘 모르더라도, 그 위에 입혀진 스토리를 좋아한다. 스토리가 곧 기술이다. 보여주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기술이 진정한 고수다. 이번에 선보인 ‘로통드 드 까르띠에 아스트로미스터리’ 시계가 대표적이다. 시계 바늘이 무브먼트에 연결되는 부분을 눈에 보이지 않게 처리해 시계 바늘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로 우주에서 회전하는 천체 궤도를 연상시킨다.”

여성의 시계에 대한 관심이 계속해서 커질까.

“좋은 가방을 갖고 싶듯이 시계에 대한 관심도 커질 수 있다고 본다. 나만이 가질 수 있다는 희소성에 무게를 두는 것 같다.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고급 시계와 고급 핸드백은 통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제네바=박현영 기자 hypark@joongang.co.kr
사진=까르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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