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밥 15공기, 윗몸일으키기 1000개…한국썰매 5년 만에 천지개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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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윤종·서영우가 입문 5년 만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두 선수는 23일 월드컵 5차 대회에서 지난 4일 별세한 로이드 코치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담은 스티커를 썰매에 부착하고 트랙을 질주했다. [휘슬러 AP=뉴시스,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

“오케이?” “오케이!”

 23일(한국시간) 캐나다 휘슬러 슬라이딩 센터에 힘찬 구령이 울려퍼졌다. 두 선수는 얼음 트랙을 힘차게 지친 뒤 170㎏이나 되는 썰매에 날렵하게 올라탔다.

1450m의 트랙을 쏜살같이 타고 내려와 마지막 결승선을 시속 150.24㎞로 통과했다. 봅슬레이 월드컵 대회에서 아시아 첫 우승자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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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코치의 부인(가운데)과 시상대에 선 원윤종(왼쪽)과 서영우. [휘슬러 AP=뉴시스, 대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

 변변한 슬라이딩 트랙 하나 없던 썰매 불모지 한국이 봅슬레이 세계 1위에 올랐다. 봅슬레이 남자 2인승 간판 원윤종(31·강원도청)·서영우(25·경기도연맹)는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IBSF) 월드컵 5차 대회 남자 2인승에서 리코 페터-토마스 암라인(스위스)과 함께 1·2차 시기 합계 1분43초41로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24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월드컵 6차 대회에선 9위(1분43초54)에 머물렀지만 원윤종·서영우는 올 시즌 월드컵 랭킹포인트 1위(1153점)를 달리고 있다.

 대학 같은 과 선후배(성결대 체육교육학과)인 둘은 2010년 11월 정식 트랙에서 썰매를 처음 탄 지 5년 2개월 만에 세계 정상에 올랐다.

원윤종은 “1년 중 11개월을 함께 지낸다. 이젠 가족 같다”고 했고, 서영우는 “윤종 선배가 잘 조종할 수 있도록 뒤에서 잘 밀어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원윤종이 썰매를 조종하는 파일럿이라면 동생 서영우는 썰매를 미는 브레이크맨의 역할을 한다. 이용 봅슬레이대표팀 감독은 “봅슬레이에선 선수들 간의 호흡이 절대적인데 둘은 환상의 짝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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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봅슬레이를 타기 전 두 선수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육상 단거리 선수 출신 서영우는 합숙 생활에 지쳐 운동을 그만뒀고, 원윤종은 엘리트 체육을 한 번도 안 해본 초보였다. 둘 다 대학 졸업 후 체육 교사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둘의 진로가 바뀐 건 2010년이었다. 그해 여름 봅슬레이 대표 김동현(29·강원도청)의 소개를 받아 대표 선발전에 지원했다. 원윤종은 “교사도 좋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영우는 “친구 따라 봅슬레이 강습회에 가서 기초만 배우고 스타트용 썰매를 탔다. 내가 대표로 뽑힐 줄은 몰랐다”고 회상했다.

 얼떨결에 대표선수가 됐지만 세계무대에선 선수 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둘은 2010년 11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에서 열린 공식 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레이스 도중 썰매가 전복돼 얼음 트랙을 깨뜨렸다. 다른 팀들은 훈련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고, 경기장은 한동안 폐쇄됐다.

썰매가 뒤집혀 다치는 건 다반사였다. 서영우는 “외국에서 몇 달씩 지내면 외롭고 힘들다. (썰매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하루에 밥 15공기를 먹으면서 몸무게를 불리는 과정이 특히 힘들었다”고 말했다.

기록을 끌어올리기 위해 75㎏의 몸무게를 110㎏까지 불린 원윤종은 “출입국 심사 때마다 내 얼굴과 (체중을 불리기 전에 찍은) 여권 사진이 달라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며 웃었다.

 두 선수는 아침 6시에 일어나 1000개씩 윗몸 일으키기를 하고, 220~230㎏의 스쿼트(역기를 들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운동)를 하며 근력을 키웠다. 하루 8시간씩 이어지는 강훈련을 버텨냈고, 매일 밤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원윤종·서영우는 2013~14시즌에야 비로소 진짜 선수로 거듭났다. 2013년 11월 아메리카컵에서 국제 무대 첫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장을 망가뜨렸던 파크시티 트랙에서 열린 대회였다. 그리고는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 18위, 지난해 3월 세계선수권 5위에 오르며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이 감독은 “외국 선수들이 우리의 성장 비결을 물어보면서 놀라워한다”고 말했다. 원윤종은 “우리 경기 장면을 외국 선수들이 비디오로 찍어간다. 그만큼 위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두 선수가 성장하는데는 지난 4일 암으로 세상을 떠난 외국인 코치 ‘고머’의 공이 컸다. 소치 겨울올림픽 때부터 한국 대표팀의 기술 향상을 도왔던 스승 말콤 고머 로이드(영국) 코치를 기리기 위해 이들은 썰매와 헬멧에 로이드 코치의 사진과 중간 이름인 ‘고머’를 뜻하는 ‘G’를 붙인 채 레이스를 펼쳤다.

5차 대회에서 우승한 뒤엔 로이드 코치의 부인 지니 로이드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지니 로이드는 ‘평창을 향해, 금메달을 위해 나아가라’는 메시지를 적은 기념 메달을 직접 만들어 둘의 목에 걸어줬다.

 쾌속 질주중인 둘은 2년 뒤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메달 획득을 노린다. 서영우는 각오를 다지기 위해 왼 발목에 올림픽 오륜 마크를 새겼다.

그는 “작은 산에 불과했던 곳(알펜시아 리조트)에 트랙이 지어지는 걸 보면 가슴이 설렌다. 하루 빨리 평창 트랙을 달리고 싶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봅슬레이처럼 우리도 계속 전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지한 기자 kim.ji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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