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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논리가 지배한 글로벌 표준 경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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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호 20면

그림 1 작가 미상, '우편마차의 조우-“굿 나이트”', 1830년대쯤. Harold E. Malet, Annals of the Road, London, 1876, p. 279.

정답은 ①영국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우선 두 마차가 동일한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은색 차체에 갈색 문이 달려있고 바퀴는 붉은 색이다. 문짝에 엠블럼이 찍혀 있고, 차체에 차량번호가 적혀 있다. 전문적인 역사학자라면 영국의 우편마차 회사인 ‘로열메일(Royal Mail)’ 소속의 마차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가 아닌 일반인도 정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힌트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관심 주제다. 바로 마차가 길의 왼편으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보기의 나라들 가운데 당시에 좌측통행을 하던 곳은 영국 뿐이다.


고대에는 고삐·무기 쥐려 좌측통행오늘날 세계 인구의 35%는 영국처럼 차량이 좌측으로 운행하는 국가에 살고 있고 65%는 우측통행 국가에 살고 있다. 어떤 연유로 각 국가들은 나름의 통행 방향을 갖게 되었을까? 역사적으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보자면 좌측통행의 흔적이 상대적으로 많다. 그리스·이집트·로마에서 마차가 좌측통행을 하도록 규정한 기록들이 남아있다. 구체적인 이유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보다 많으므로, 통상 고삐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을 자유롭게 두거나 채찍을 쓸 수 있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는 주장이 있다. 오른손으로는 유사시에 무기를 쥐어야 했기 때문에 좌측통행이 유리했을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그 밖에도 다양한 가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 추측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이유로 좌측통행이 자리를 잡았다고 볼 근거도 없다. 또 동일한 국가에서 좌측통행과 우측통행이 지역별로 공존한 사례도 많다. 역사적 사례도 통일되진 않는다. 영국 남부 스윈든 부근에서 발견된 로마시대의 도로에서는 길의 좌측이 우측보다 더 낮게 패인 흔적이 발견됐다. 같은 로마시대지만 터키에서는 우측통행의 자취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제 두 번째 문제를 던지기로 한다. 그림 1과 관련해서 제시된 보기 가운데 영국을 제외한 세 나라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떤 이유로 이 나라들은 모두 우측통행을 했던 것일까? 정답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친 유럽의 상황과 관련이 깊다. 바로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야기다.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던 1792년, 프랑스 정부는 도로통행의 방향을 우측으로 통일하는 칙령을 제정했다. 왜 우측통행을 택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어쨌든 혁명은 계속됐고, 혁명의 폭풍이 자국에 전파될 것을 우려한 주변 군주국들은 연합군을 형성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유럽 곳곳에서 연이어 승전고를 울렸다. 유럽 전역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나폴레옹 군대는 우측통행을 했고 휴식을 취할 때에도 도로 우측을 사용했다. 점령지의 주민들은 이에 따라 우측통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 2 미터법의 내용을 보여주는 그림, 1800년.?차례로 1 부피(액체), 2 질량, 3 길이, 4 넓이, 5 화폐가치, 6 부피(고체).

우측통행보다 프랑스가 세계사에 더 진하게 남긴 흔적은 도량형이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각국은 나름의 측정단위를 사용해 왔다. 그런데 지역 간에 교역과 교류가 늘어나면서 도량형을 전국적으로 통일시키는 사업이 중요해졌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도량형의 지역적 격차가 커서 국민들의 불만이 많았다. 통일된 도량형이 없이는 시장이 건전하게 발달하기 어렵고, 국가가 세금을 수취하는 데에도 장애가 많았다. 프랑스 정부와 지식인들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혁명의 진행되는 가운데 콩도르세·라플라스·라부아지에 등 당대의 석학들이 도량형위원회를 구성했고, 여기서의 논의를 기초로 1795년에 우리에게 친숙한 미터법이 제정됐다. 지구 자오선의 4000만 분의 1을 1m로 삼았고, 섭씨 4도의 물 1L(1000㎤)의 무게를 질량 표준인 1㎏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십진법에 입각해 보조단위들이 결정되었다. 계몽주의 선도국가, 과학 선진국의 이미지를 한껏 보여주는 도량형이었다. 새 도량형은 1800년부터 사용됐다.


그림 2는 새 도량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번부터 번호에 따라 차례로 액체의 부피(L), 질량(g), 길이(m), 넓이(아르), 화폐가치(프랑), 고체의 부피(스테르)와 관련된 작업을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나폴레옹 전쟁과 더불어 새 제도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됐다는 사실이다. 나폴레옹 민법전이 근대 사회의 새로운 질서를 담았다면, 미터법은 근대 세계를 양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담았다. ‘정복은 있다가도 없지만, 미터법은 영원할 것’이라는 나폴레옹의 찬사는 참으로 적절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미터법을 사용하는 것도 일본이 받아들인 프랑스 제도가 일제 강점기에 국내에 도입되었던 역사에 기인한다.


미터법, 일제 거쳐 국내에 도입같은 시기에 우연스럽게도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운행 방향에 관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에서는 대량운송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큰 마차에 화물을 실어 여러 마리의 말이 끌게 하는 방식이 확산됐다. 그런데 이런 화물마차에는 마부가 앉은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마부는 주로 오른손잡이였으므로 가장 뒤편의 왼쪽 말에 타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관습이 퍼지면서 우측통행이 보편화되어갔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운행 방향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점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경을 넘는 승객과 화물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혁신적 교통수단인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변화됐다. 이에 따라 20세기 전반에 일부 국가들은 통행방향을 바꾸는 정책을 실시했다. 한편 과거 열강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제국의 통행제도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2차 세계대전 후 탈식민지화의 과정에서 변화를 겪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한반도에서는 미국과 소련의 영향 하에 남북한 모두 좌측통행을 버리고 우측통행을 받아들였다. 필리핀과 타이완도 독립과 더불어 우측통행을 택했다.

그림 3 좌측에서 우측으로 통행방향을 바꾼 1967년 9월 3일 스톡홀름 거리 풍경. 중앙선을 넘어 차를 돌리느라 거리가 혼잡하다.

20세기에도 통행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가장 화끈한 전환은 1960년대 스웨덴에서 전개됐다. 스웨덴은 과거 좌측통행을 해 왔는데, 자동차 시대에 점차 불편함이 커졌다. 인접한 노르웨이와 핀란드가 이미 우측통행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투표와 입법운동이 진행됐고, 마침내 1967년 9월 3일 일요일 오전 5시를 기해 전면적으로 우측통행을 실시하기로 결정됐다. 그림 3은 이 역사적인 날 아침 스톡홀름의 거리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선을 넘어 위치를 바꾸려는 차량들과 사람들이 뒤섞여 무척이나 혼잡한 모습이다. 갑작스런 변화로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하지는 않았을까? 신기하게도 사고율은 높아지지 않았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통행속도를 낮춘 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드넓은 영역을 단일한 질서로 통일하기 위해서는 표준화가 필수적이다. 과거에는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필요했고, 교역과 교류가 활발해진 오늘날에는 세계화된 세상을 선도하기 위해 필요하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이 가장 중요시한 일도 ‘거동궤(車同軌) 서동문(書同文) 행동륜(行同倫)’이었다. 수레바퀴의 규격을 통일하고, 글 쓰는 한자를 통일하고, 행동에 있어 윤리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표준화야말로 세상을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가는 핵심 작업이다. 오늘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좌·우측 통행에도 세계사의 과정에서 발현되었던 힘의 논리가 슬그머니 감추어져 있다.


송병건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bks21@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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