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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을 살려낼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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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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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연
논설위원

한 번 꺾이면 다시 뜨기 어려운 게 승부의 세계다. 타이거 우즈의 경기를 볼 때마다 그런 안타까움을 느낀다. 하지만 서너 차례나 꺾인 안철수 의원에겐 또 온기가 돈다. 탈당 전 안 의원은 옹색하고 막막했다. 친노에게 그는 ‘앉아 있으면 곧 죽고, 밖에 나가면 금방 죽을 존재’로 여겨졌다. 안 의원 얘기가 시작되면 ‘안에서도 춥지만 나가면 시베리아’라는 10년 전 손학규의 딱한 겨울이 꼭 뒤따라 나왔다.

 그맘때 안 의원을 만났더니 영어 책 한 권을 들고나와 “소설 『마션』에 빠졌다”고 했다. 화성 탐사 중 고립된 과학자의 지구 귀환 얘기다. 스토리를 알려준 뒤 “한국 정치판에서 버티는 건 화성에서 생존하는 수준”이라며 “이젠 정치가 뭔지 알겠다”고 엷은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안철수를 살려내는 건 정치를 알게 된 안철수가 아니었다. 안철수 현상이다. 국민 두어 명 중 한 사람이 이 당 저 당 다 싫다는 무당파다.

 이쯤 되면 이젠 안철수가 안철수 현상을 살릴 차례다. 정치가 현상만으로 바뀌진 않는다. 선거에서 표를 많이 얻어야 이기는 게 민주 정치다. 많은 표를 얻으려면 이런저런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정치를 몰랐던 안철수는 몇 번이나 실패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알게 된 지금의 안철수는 살려낼 수 있을까? 안 의원은 일단 국민의당으로 길을 나섰다.

 국민의당은 지금 호남 민심을 놓고 야당과 다투고 있다. 영남은 요지부동이다. 야권 분열을 겁내는 수도권은 여전히 연대를 고대하며 서성댄다. 게다가 이제 걸음을 뗀 국민의당 내엔 ‘안철수 사당(私黨)’ 논란까지 생겼다고 한다. 탈당 의원들과 안 의원 측근 세력 간에 알력이 있다는 거다. 현재 지지율이라면 국민의당엔 10석이 넘는 비례 의원이 배정된다. 파워 게임이 왜 없겠는가.

 2002년 대선 막바지 이회창 캠프엔 이런 일도 있었다. 개혁적 명망가들로 ‘이회창 정부 초대 내각’을 꾸려 선거 전에 발표하자는 아이디어다. 박근혜 의원은 총리, 심재륜 전 고검장은 법무장관 등으로 인기와 평판 좋은 인사들이 거론됐다. 하지만 발표되진 못했다. 패색이 짙어가는 캠프였는데도 “그 자리는 내 자린데…”란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야권 헤게모니 싸움이나 당내 파워 게임이 안철수 현상은 물론 아니다. 안철수 현상을 살리려면 안 의원은 결국 정치와 싸워야 한다. 한국 정치의 많은 문제는 거대 양당의 치킨 게임에서 비롯된다. 영·호남 패권 싸움이 속살이다. YS와 DJ 정치로 올라가는데, 역설적이지만 안 의원은 두 사람의 성공 방식을 배워야 한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양김(兩金)이 만든 신당은 실질적으로 여당에도 이기고 야당에도 이겼다. 군부독재 심판이란 강력한 명분을 내걸고 동지를 모았다.

 국민의당에 그런 명분은 국회 정상화일 게다. 모양만의 국회가 아니라 국회다운 국회를 만드는 일이다. 정치 개혁에 대한 청사진과 프로그램이 당연히 나와야 한다. “강철수가 되겠습니다” “여의도를 청소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란 정도의 다짐에 한국 정치가 넘어가진 않는다. 농담을 조금 늘리고, 어법이 다소 단호해진 겉모습으로도 안 된다. 정치를 알게 됐다지만 안 의원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힘을 보탤 수 있는 많은 안철수가 있어야 한다. 국민의당은 중도개혁의 깃발을 내세웠다. 호남 비노만이 아니라 여권과 영남으로, 수도권으로 불이 옮겨붙어야 한다. 유승민이든 정의화든, 아니면 김부겸이든 정운찬이든, 아니라면 또 다른 누가 됐든 가세해야 한다. 국민의당은 제3의 길을 가는 세력이란 믿음을 만들어야 한다. 또 다른 안철수를 위해서라면 안철수가 물러서야 하는 일이다. 동시에 내년 대선만을 꿈꾼다면 어림없는 일이기도 하다.

 안철수 현상을 만든 건 정치인 이전의 안철수가 보여준 공공성에 대한 헌신이었다. 정치인 안철수라고 다를 게 없다. 안철수의 초심이 안철수 현상의 에너지다. 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 물러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친노는 노무현을 따라가지 못하고 안철수는 안철수 현상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을 극복한다는 건데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