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 의원 기득권에 막혀 결국 '선거구 없는 나라'로

중앙일보

입력

 
2016년 1월 1일 세시(歲時)부터 대한민국이 ‘선거구 없는 나라’가 됐다.

헌법재판소의 선거법 개정시한인 12월 31일 자정을 앞두고 여야 지도부의 막판 협상이 결렬되면서다. 1일 0시를 넘기면서 기존 246개 국회의원 지역구는 모두 법적 효력을 잃었다. 4ㆍ13 총선을 넉 달 앞두고 국민은 투표할 지역구가 어디인지, 후보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대혼란 상황을 맞게 됐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더불어민주당(약칭 더민주) 문재인 대표 등 여야 지도부와 정의화 국회의장의 무능ㆍ무책임, '선거구 획정이 늦어질수록 현역에 유리하다'는 현재 국회의원 293명의 기득권 야합이 빚은 ‘입법 비상사태’다. '선거구 간 인구편차를 2대1 이하로 바꾸라'는 헌재 결정(2014년 10월 30일)이후 14개월을 허송세월하며 자초한 사태다.

세밑 12월 31일 오후 4시 정의화 국회의장은 김무성·문재인 여야 대표를 의장실로 불렀다. 정 의장은 "자정까지 여야 합의가 안되면 0시를 기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구 획정위원회에 기존 의석비율(지역구 246, 비례 54석)대로 선거구획정안(의장안)을 만들 것을 요청하겠다"고 최후 통첩했다. 선거구 획정위가 헌재 기준(선거구 간 인구편차 2대1 이하)에 따라 인구 하한선보다 인구가 줄어든 지역(주로 농·어촌)을 통·폐합해 선거구를 다시 정하면, 그걸 직권상정하겠다는 뜻이다. 정 의장은 임시국회 종료일인 1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장안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국회 관계자는 "문제를 풀 능력이 없는 양당 대표로선 정 의장이 직권상정해주길 오히려 바라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정 의장은 의원정수 300명 및 지역구 246석, 비례 54석을 유지하는 것 외에 ^인구수 산정기준일을 현행(8월31일)보다 두 달 늦추며 ^농·어촌 지역구 축소를 최소화하되 ^자치구·시·군 분할금지 원칙에 예외를 두는 선거구획정안을 검토해왔다.

이날 양당 원내대표들은 국회에서 막판협상을 벌였지만 "경제활성화법안과 민생법안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새누리 원유철),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선거 연령을 18세로 하향해야 한다"(더민주 이종걸)는 기존 입장만 재확인한 채 합의에 실패했다.

앞서 정 의장은 오후 2시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과 더민주 문희상 의원을 포함한 여야 중진의원 10명을 불러 직권상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다. 이 자리에서 새누리당 심재철 의원은 ”당장 내일부터 입법비상사태가 터지고 절차적으로도 획정위를 왔다갔다해야 하는 데, 며칠 전 심사기일을 지정해 오늘 밤 직권상정을 했으면 새해 비상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무소속 안철수 의원도 기자들에게 "제가 어제 밤을 세워서라도 논의해서 타결봐야 된다고 했는데 협상 일정도 안잡고 너무 무책임하다“고 양당을 싸잡아 비판했다.

명지대 윤종빈 교수(정치학)는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 선거일정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피해는 고스란히 유권자에게 돌아간다”며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선수인 국회의원에게 맡기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라 현역은 손해볼 게 없다는 암묵적 공동체 의식으로 직무유기를 반복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국회는 4년마다 선거구 획정을 놓고 졸속처리를 반복하고 있다. 18대 국회는 2012년 2월 말 지역구를 줄이는 협상을 하다가 돌연 전체 의원정수를 300석으로 늘려 "군사정권도 못한 300석을 무너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헌재가 2003년 12월 말을 시한으로 지역구 최대·최소 인구편차를 '3대1' 이하로 하라는 기준을 제시했을 때는 2004년 3월 12일에야 의원정수를 273명에서 299명으로 26명이나 늘리는 획정안을 처리한 기록도 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강원택 교수는 "여야 대표가 7~8번 만나도 타협이 안되는 건 정당정치의 무기력, 리더십의 부재 때문"이라며 ”고(故) 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났다면 줄 거는 주고 받을 거는 받으면서 협상을 끝냈지 이런 상황을 만들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효식ㆍ박유미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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