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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들이 본 세계의 현장…"트럼프, 와, 키 큰데~"

중앙일보

입력

188cm. 지난 9월 9일 실물로 처음 도널드 트럼프를 봤을 때 느낌은 "와, 키가 큰데~"였습니다.

트럼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의회 앞 잔디광장에 진을 쳤습니다. 이란과의 핵 협상에 반대하는 강경 보수단체 '티파티'의 집회였습니다. 기자들의 최대 관심은 "트럼프가 어디서 나타날까"였습니다. 행사장 단상에 올라갈 때까지 밀착 취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기자들이 트럼프가 하차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몰려 있었습니다. 근데 이상했습니다. 경호원들이 근처에 보이질 않았습니다. 슬그머니 발길을 돌려 반대편 의회 출입구 쪽으로 향했습니다.

근데 웬일, 정말 트럼프가 경호원들에 둘러싸여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닙니까. 쾌재를 불렀습니다. 장신의 트럼프에겐 광채가 났습니다. 그의 금발 머리카락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20년 넘게 취재를 하면서 광채를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2009년 자민당 정권을 뒤집은 직후 만났던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간사장도 그랬습니다.

순간의 기쁨과 놀라움도 잠시. 50여 m가량을 함께 걸어가는 동안 아무리 말을 걸어도 트럼프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쉬움을 달래며 행사장 구석에서 집회를 지켜보고 있는 데 이번에는 2008년 대선 당시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이 다가와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에서 온 특파원"이라 말을 건네자 페일린은 활짝 웃으며 "아~, 나도 몇 년 전 한국 다녀왔어요"라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습니다. 대선 당시 한국과 북한도 구분하지 못했던 그였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생각이 복잡했습니다.

잔디광장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이러스 콜린스(46)는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집회를 보러 일부러 왔다"며 계속 말을 걸었습니다. 그는 연신 "우리 티파티가 미는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 장담했다. 속으로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하면 그가 맞고 내가 틀렸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트럼프 퇴장 시 마지막 기회가 왔습니다. 트럼프보다도 키가 큰 경호원들은 달려드는 기자들을 무자비하게 밀어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가 나를 기억했었던 것일까, 성큼성큼 나에게 다가오더니 어깨까지 툭 치는 게 아닙니까. "난 한국을 좋아해요"란 그의 첫 한국 관련 발언도 그 때 나왔습니다. 그가 '막말 후보'만 아니었으면 더욱 좋으련만.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지난 9월 3일, 베이징은 유난히 맑았습니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죠. 스모그 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답은 중국의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입니다. 열병식 쪽빛 하늘을 위해 베이징 주변 모든 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군사 굴기를 선언한 성스러운 날, 단 한 점의 스모그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겁니다.

행사는 오전 9시에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자는 새벽 3시에 일어났습니다. 외국 기자는 새벽 4시30분까지 프레스센터에서 실시되는 검문검색을 통과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분확인→검색기→몸수색 등 무려 7번의 검색 과정을 거친 후에야 천안문 취재석에 앉을 수 있었지요. 참고로 이날 열병식의 주제는 ‘평화와 자유 옹호’였습니다.

열병식은 황제 알현식을 방불케 했죠. 오전 9시, 천안문 정문 격인 단문(端門) 앞에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펑리위안(彭麗媛)여사가 섰습니다. 그리고 해외 귀빈들이 한 명씩 단문을 통과해 시 주석 부부와 악수를 하며 예를 차렸습니다. 단문 양쪽엔 각각 7명의 병사가 착검한 소총을 들고 있었습니다. 참 불편한 장면이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단문에 모습을 드러낼 때 관중석에선 환호와 함께 박수 소리가 들렸습니다. 미국의 불만에도 열병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의 용기(?)에 대한 중국인들의 박수였습니다. 현지인들의 마음을 잡는 것보다 좋은 실리외교는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 주석은 말했죠. “중국군의 사명은 조국 안보와 인민, 그리고 세계의 평화 수호”라고 말입니다.

열병식 하이라이트는 무기였습니다. 이날 공개된 500건의 무기 중 84%인 420여 건이 처음으로 공개됐습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둥펑-31A와 둥펑-5B이 사열대를 지날 때 기자 옆자리에 앉았던 국무원 홍콩·마카오 판공실 직원이 자랑스럽게 “미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핵 미사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7만 마리의 비둘기가 천안문 상공을 날랐습니다. 순간 의문이 들었습니다. “평화의 비둘기를 날리고 핵 미사일을 과시하는 중국의 저의가 뭘까”하는 의문 말입니다. 중국의 굴기가 꼭 평화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베이징=최형규 특파원 chkc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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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7일, 보스턴은 꽤나 쌀쌀했습니다. 한국에서 날아온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87)할머니는 그날 아침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스쿨 정문 앞에서 휠체어에 앉아있었습니다. 그곳 강연이 예정돼있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만나 사과를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용수 할머니 손에는 “나는 위안부 생존자입니다”라는 종이 팻말이 들려있었습니다.

‘아베 총리는 이용수 할머니를 어떻게 대할까’를 머리 속으로 그리며 기자도 한동안 그곳에 서있었습니다. 순간, 아베 총리가 다른 출입구를 이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긴장하며 건물 주위를 둘러보니 케네디 스쿨엔 출입구가 많았습니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건물 안마당 입구가 눈에 띄었습니다. 가보니 일본 정부 차량으로 보이는 승용차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 시각, 정문 앞에선 하버드대 학생 100여명의 침묵시위가 시작됐습니다. 학생들은 “당신이 (위안부 문제를) 부인하는 것은 피해자들을 두번 죽이는 것”“위안부 피해자에게 정의를” 등의 피켓을 들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했습니다.

그런데, 아베 총리는 이미 케네디 스쿨 강연장에 들어와있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를 피해서 정문이 아닌 다른 문으로 입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연설에서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질의응답 시간에 한국계 하버드생인 최민우(20)씨가 그에게 돌직구를 날렸습니다. “강력한 증거가 있는데, 왜 일본 정부는 수많은 여성을 강제로 성노예로 만든 데 개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답변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인신매매’라는 단어를 사용해 일본 정부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강연을 끝낸 그의 동선이 궁금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계속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베 총리는 나갈때도 정문 대신 건물 코너의 문을 이용했습니다. 끝까지 이용수 할머니와의 만남을 피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그날의 아베 총리와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아베 정부가 역사의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우려스럽기만 합니다.

뉴욕=이상렬 특파원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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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는 파리로 시작해서 파리로 끝난 듯합니다.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직후 프랑스 파리의 공화국광장에 있었습니다. 당일 광장은 열기로 가득했습니다. ‘즈 쉬 샤를리(Je Suis Charlie, 나는 샤를리다)’ 구호가 광장을 삼켰습니다. “리베르테(Liberté·자유)”로도 가득했습니다. 숭고한 가치를 지킨다고 믿는 이들의 얼굴에서 종종 보이는 광채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불행한 일이었으나 긍정에너지로 전환되는 듯한 순간이었습니다.

11월의 테러는 달랐습니다. 대부분 테러 현장이 공화국광장 인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음날 공화국광장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몇 일이 흐른 뒤에야 북적이었습니다. 서너 일 지났을까, 공화국광장에서 '펑'하는 소리가 났는데 광장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공포 속에 질주를 했습니다. 테러 현장이던 한 레스토랑 앞에서도 유사한 소음에 꽃다발과 초 더미 위로 뛴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듯 11월의 파리 테러는 프랑스인들에게, 더 나아가 유럽인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습니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공연을 보거나 차를 마시거나 와인을 한 잔 하는 행위가 테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근원적 공포입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대테러 대응에 나서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IS에 대한 공습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자국 내에선 수색과 검문이 이어졌습니다. 프랑스 당국은 최근 23살의 여성이 임신한 듯 가짜 배를 하고 있는 걸 적발하고 테러 용의자로 체포했습니다. 여성의 컴퓨터에서 '이슬람국가(IS)' 선전물이 나왔다는 겁니다. 여성은 "도둑질하려고 만든 배"라고 맞선답니다. 최근 영국에선 한 쇼핑센터에 긴 칼을 보곤 쇼핑객들이 패닉에 빠져 대피했습니다. 경찰이 "테러는 아니다"라고 달래야 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제 존재론적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절차적 정당성보단 테러 방지란 목적을 앞세울 것인가. IS란 거악(巨惡)의 섬멸을 위해 못지 않은 거악인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협상할 것인가. 공습으로 인한 시민들의 희생 또한 감내할 것인가. 유럽 사회의 기독교성은 보편적인가. 무슬림계 유럽인은 그 자체로 충돌적 자아인가. 어느 것 하나 답하지 쉽지 않습니다. 유럽의 고통입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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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올 한해 한일 관계에서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6월22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식 말입니다. 서울에서도 행사가 있었지요.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가 교차로 참석했습니다. 당초 두 정상 모두 불참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가 행사 이틀 전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만큼 양국 관계는 살얼음판이었고 당국간 물밑 신경전은 치열했습니다. 두 정상의 참석으로 한일 관계개선에 대한 기대도 부풀어올랐지요.

기자가 지켜본 도쿄 행사장인 쉐라톤 미야코 호텔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일본 여야 대표, 전직 총리, 주요 각료를 비롯해 1000여명이 자리를 메웠습니다. 하이라이트는 아베 총리의 축사였지요. 연단 뒤론 조선조 문인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星山別曲)’이 적힌 병풍이 쳐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50년 전 양국간 기본조약 비준서 교환 때 쓰였던 병풍입니다. 아베 총리는 “지난 50년간 우호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50년을 내다보며 함께 손잡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자”고 했습니다.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외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기시 친동생) 전 총리가 양국 국교정상화에 깊이 관여했다고도 했지요. 박 대통령과 간접 대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교 정상화는 박정희 대통령과 사토 총리 때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행사의 수사(修辭)와 현실은 괴리가 있었습니다. 광복 70주년과 전후 70년의 역사 문제가 양국 관계를 짓눌렀지요. 아베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 일본 근대 산업시설의 세계 문화유산 등재 문제를 비롯해 고비가 적잖았습니다. 양국 관계는 11월 박 대통령-아베 총리간 첫 정상회담을 통해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최대 쟁점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기로 했지요. 28일 위안부 문제를 타결 지은 한일 외교장관 회담은 올해를 넘기지 말자는 양국의 의지가 들어있는 것 아닐까요. 양국 모두에 이익이었던 국교정상화 50년의 중압감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hwas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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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4일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정말 더웠습니다. 아침부터 찌는 듯한 열기에 상의는 땀으로 젖었고 미국 대사관 건너로 보이는 짙푸른 바다는 그늘 없는 땡볕의 위력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땡볕에서 2시간이나 기다린 인파는 미국 대사관에 성조기가 올라가자 환호를 터뜨렸습니다. 그 짧은 순간 1961년 관계를 끊었던 미국과 쿠바가 54년 만에 국교 정상화를 완료했습니다.

쿠바가 어떤 나라입니까. 62년 소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들어오려 하고 미국이 이를 막겠다며 해상을 봉쇄해 3차 세계대전 문턱까지 가게 만든 나라입니다. 북한이 장거리미사일과 핵을 개발하고 있지만 지리적 인접성으로 따지면 62년 쿠바와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쿠바까지의 거리는 145㎞. 그런 쿠바를 상대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과거의 적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독트린으로 국교 정상화를 단행했습니다. 올해 오바마 외교의 화룡점정이었습니다.

관광 천국인 쿠바를 자유로운 나라로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성조기 게양식 당일 미국 대사관 앞의 인파에서 쿠바 사복 경찰들의 번쩍이는 눈빛과 수도 없이 마주쳤습니다.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한 젊은 ‘사복’은 저의 어깨를 일부러 부딪히며 말이 필요 없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취재를 그만 하라는 애기였습니다. 시내 곳곳에 경찰들이 배치돼 있었습니다. 쿠바가 강력한 행정·치안력으로 체제 유지의 고삐를 쥐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쿠바는 중남미 국가와 달리 치안이 양호합니다) 하지만 그런 쿠바도 먹고 살기 위해 미국의 달러를 택했습니다. 오바마 정부 역시 쿠바의 손을 잡아 중남미로의 영향력 확대를 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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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 취재를 하면서 두차례 가봤던 평양이 떠올랐습니다. 오바마의 쿠바가 북한이었다면 지금 한반도의 정세가 얼마나 바뀌어 있을까요. 하지만 올해 오바마 독트린은 아바나에서 그쳤고 평양은 미국을 상대로 적대시정책에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8월 14일 아바나는 오바마 외교의 승리이자 한계를 보여주는 현장이었습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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