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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 입고 컴백 … 검증된 레퍼토리들의 변신 대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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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호 26면

올 연말 뮤지컬 시장은 눈에 띄게 조용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경쟁적으로 대형 신작을 터뜨리며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던 업계가 올해는 검증된 흥행 레퍼토리들로 각자 실속을 챙기는 모양새다. 초연 30주년을 맞은 대작 ‘레미제라블’을 비롯해 국내에서만 12번째 시즌을 맞은 쇼 뮤지컬 ‘시카고’, 매니어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 등 면면도 다양하다. 신작이라곤 황정민 연출·주연의 일본 라이선스 뮤지컬 ‘오케피’ 단 한편이다. 따끈한 신작에 목마른 뮤지컬 팬들에겐 다소 김빠지는 겨울이지만, 재연작들도 저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달라진 모습을 어필 중이다. 한번쯤 봤던 무대지만 올 겨울 버전의 달라진 관전 포인트를 짚어봤다.?

추억의 명화 속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2016년 1월 31일까지 샤롯데씨어터)연말 공연장 나들이를 하고 싶지만 젊은 여성층 위주의 분위기가 주저된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추천한다. 반백의 중장년층이 객석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부부동반은 물론 단체관람 남성관객도 상당하다. 문화계 전반에 불고 있는 복고 취향과 중장년층의 향수를 작정하고 긁어주기 때문이다. 사실 ‘바람사’는 올해 초 국내 초연 당시 예술성 넘치는 프랑스 뮤지컬로 홍보했지만 뮤지컬 팬들에게는 ‘영화 하이라이트 짜깁기’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추억의 명화’ 세대들의 꾸준한 지지가 이어지자 올드팬층에 올인하는 커스터마이징 작업을 거쳐 돌아왔다.


원작 무대에 없는 ‘타라의 테마’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형식으로 삽입해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영상으로 막을 연다. 프랑스 뮤지컬 특유의 예술적 안무를 대폭 축소하고 스토리의 밀도를 높였다. 코르셋을 조이고 커텐으로 드레스를 만드는 영화 명장면 열전은 여전하지만 오히려 얼마나 영화와 가까운지가 관전 포인트다. 영화와의 차별성을 외치기보다 철저히 영화에 기대고 있는 무대인 것이다. 싱크로율 높은 캐스팅이 관건인 이유다. 데뷔 이래 처음으로 장발을 싹둑 자른 신성우가 상남자 레트 버틀러에 딱 어울린다.

브로맨스의 케미, ‘프랑켄슈타인’(2016년 2월 28일까지 충무아트홀 대극장)지난해 초연한 ‘프랑켄슈타인’은 한국 창작뮤지컬의 현재를 보여주는 작품. ‘삼총사’ ‘잭더리퍼’ 등 유럽 뮤지컬 재창작에 탁월한 실력을 보여 온 왕용범 연출·이성준 작곡 콤비가 세계시장을 겨냥해 아예 유럽 스타일로 창작했다. 유럽 뮤지컬의 웅장한 음악과 고풍스런 의상, 스펙터클한 무대미술 등을 그대로 적용해 기시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뮤지컬 팬의 취향을 명중시킨 대중성에 높은 점수를 받으며 100억 매출을 향해 순항중이다.


관객 대부분이 20~30대 여성인 상황에서 훤칠한 외모에 가창력까지 폭발하는 남자배우는 무대 위 다다익선인 법. ‘프랑켄슈타인’은 여주인공의 비중을 확 줄이고 창조주 빅터와 피조물의 관계에 과감히 브로맨스 코드를 택했다. 표면적으로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대결구도지만 복수의 드라마 이면엔 두 친구의 우정을 넘어선 애정이 흐른다. ‘간지폭발’ 제복 자락을 휘날리는 빅터와 대체로 헐벗고 등장하는 앙리의 야성미, 완급조절을 잊은 듯 시종일관 빵빵 터지는 두 남자의 노래에 공감각적 호사를 누린다. 커튼콜엔 두 남자 주인공이 ‘바람사’ 급 허리꺾기까지 구사한다. 초연 배우 유준상·한지상·박은태에 더해 뉴캐스트 박건형·전동석 등 다양한 조합의 케미로 회전문을 유도한다.

유연석의 힐링 스마일, ‘벽을 뚫는 남자’(2016년 2월 14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터)대표적인 겨울 레퍼토리 중 하나인 ‘벽을 뚫는 남자’는 소시민의 평범한 삶을 위로하는 힐링 뮤지컬. 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마이클 잭슨이 극찬한 서정적인 음악이 오래도록 귓전에 남는 잔잔한 무대다. 국내에서도 2006년 초연 이후 임창정·이종혁 등이 출연하며 꾸준히 사랑받아왔지만, 올해 유연석이라는 ‘최첨단 무기’를 장착하고 폭발력을 더했다.


그가 뮤지컬 데뷔전에서 선택한 역할은 1940년대 파리의 소심한 우체국 직원 듀티율. ‘응답하라 1994’ 이후 급부상한 블루칩 배우에게 폼나는 역할은 아니지만, 유연석은 찌질한 소시민 듀티율을 샤방샤방 미소와 비장의 훤칠함으로 훌쩍 업그레이드시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송스루 뮤지컬임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 훈훈한 가창력. 반짝스타가 아니라 내공있는 배우임을 실감하며 무대에서 자주 만날 기대감에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알콜중독 의사이자 경찰, 교도소장, 변호사 등 온갖 코믹캐릭터를 한몸으로 소화하는 고창석도 매력덩어리다

로맨스가 필요하다면, ‘베르테르’ (2016년 1월 10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여심을 저격하는 순정 로맨스의 고전. 2000년 초연 이후 엄기준·조승우·송창의·김다현·규현 등 최고 배우들로만 14명의 베르테르를 배출해 왔지만, 13년 만의 ‘조 베르테르’의 귀환에 단연 관심이 쏠렸다. 최근 신작 없이 ‘지킬 앤 하이드’ ‘맨 오브 라만차’ 등 보수적인 노선을 타다 급기야 초기작까지 거슬러 올라간 조승우에게 다소 삐딱한 시선도 있었던 게 사실.


짝사랑에 신음하는 ‘유리멘탈’ 청년 베르테르가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 노인 만큼이나 노련해 보인다는 게 함정. 그러나 조승우는 역시 조승우다. 실제 첫사랑에라도 빠진 듯 해맑은 표정의 메소드 연기에 손발을 오그리다 대사인 듯 노래인 듯 감성 돋는 넘버에 넋을 놓게 된다. 베르테르의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해바라기 만발 무대와 15인조 실내악 오케스트라의 서정적인 연주도 로맨스 감성을 부채질한다.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각 제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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