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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이다’ 같은 소통이 필요한 청춘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어렸을 적 종이컵으로 만든 장난감 전화기를 기억한다. 난 유독 이 전화기를 좋아했는데, 어딜 가든 실로 이은 종이컵 두 개를 목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녔다고 한다. 참다못한 엄마가 몰래 그 장난감을 버리자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울기만 했다. 우스울 노릇이다. 다섯 살 먹은 꼬맹이가 왜 그리 전화기에 집착했는지. 더 웃긴 건 전화를 받는 상대는 없었다는 거다. 난 벽에 종이컵을 대고 여보세요, 누구세요, 소리치며 애타게 누군가를 찾았다. 엄마도 있고 아빠도 있고 친구들도 있었음에도 무언가 허전했나 보다. 텅 빈 종이컵에 대고 온갖 이야기를 쏟아냈었다.

  누군가와 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눈다는 의미가 크게 다가온 것은 말이다. 늘 목말라 있었다. 얘기하고 싶었고 털어놓고 싶었다. 영화 속 비운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굴곡 많은 삶을 살았다기에는 어린 나이지만, 입이 근질거리도록 말하고 싶은 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다.

  이런 내게 ‘소통 포럼’이라는 이름은 더 크게 다가왔다. 많은 기획 활동을 해왔지만 유독 이 기획은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통이란 두 글자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들도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후련한 소통을 전하고 싶었다. 포럼이라는 포맷이 생각을 막는 단점이 있었지만, 장애물을 헤쳐나가는 것도 포럼 기획단의 큰 과제이자 즐거움이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 시작된 포럼 기획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순조롭지 않은 과정이었다. 허나 모든 변수를 극복하고 포럼이 개최되었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다시금 소통이라는 단어를 되새겨보게 된다. 진정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지. 일대일로 하는 상담이 아닌, 다수가 참여하는 포럼인지라 전달은 상대적일 터다. 돌아가는 사람들이 조금 가벼워지기를 바랐다. 내가 답답했던 것처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속 작은 구멍을 채울 수 있기를 바랐다.

  내 뜻이 잘 전해졌을지는 모르겠다. ‘소통’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 두 가지로 명시되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열린 ‘청춘 사이다 포럼’은 아무 말 할 수 없는 청춘들에게 홀가분한 마음을 나눠줄 수 있는 행사가 되었기를. 적어도 내가 포럼 현장에서 느꼈던 그 온기를 품었기를. 마지막으로 이런 취지의 행사가 더 많이 생기고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종이컵 전화기를 가지고 다녔던 내 어린 시절처럼, 청년들 역시 보이지 않는 전화기를 가지고 다닌다. 나를 포함한 우리 청년들은 방향성을 잃기 일쑤다. 나침반이 필요하다. 말할 곳 없는 청춘들에게 입 하나를 나눠주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본다. 이 또한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소현│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3학년(청춘사이다 포럼 ‘포럼메이커’)

<이 기사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해당기관에서 제공한 보도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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