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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부러울 따름인 ‘자선자본주의’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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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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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관정 이종환 교육재단’은 국내 최대 장학재단이다. 올 한 해 동안 해외 대학·대학원의 한국 학생 300여 명에게 100억원 가까이의 장학금을 줬다. 이 재단의 해외 장학생으로 문과 계열 학생이 뽑히는 경우는 드물다. 원칙적으로 경제학 전공자 말고는 문과 학생에게는 지원 자격이 없다. 집안 형편은 선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소속 학교가 어느 정도의 명문이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 미국 아이비리그나 그에 버금가는 수준의 대학에서 자연과학이나 공학 공부를 하는 학생에게 장학 사업의 초첨이 맞춰져 있다는 얘기다.

 이런 방식의 장학사업은 8000억원 규모의 교육재단을 만든 이종환(91)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에 만났을 때 그는 “한국이 먹고살 길은 과학기술에 있다. 우리 장학생 중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왜 해외 명문대의 이과계열 학생에게 집중을 하는지, 문과 중에서는 경제학 전공만 예외적으로 장학 대상이 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주에 페이스북 지분 99% 기부 약속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약정된 금액은 현재 가치로 50조원이 넘는다. 외신은 이를 ‘자선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적 행동으로 설명했다. ‘philanthropy(자선·박애)’와 ‘capitalism(자본주의)’의 합성어인 이 용어는 약 10년 전에 등장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설립자, 숀 파커 냅스터 창업자, 투자가 워런 버핏과 같은 신흥 부호들의 기부를 설명하는 용어로 쓰인다. ‘소외된 이웃’을 위하는 전통적 자선이 아니라 게이츠 재단이 주로 에이즈와 마약 중독 퇴치를 위해 활동하는 것처럼 특정 가치의 실현을 위해 돈을 내놓는 적극적 사회 개입 행위를 일컫는다. 저커버그는 ‘인류 잠재력의 진보’와 ‘평등성 증진’을 앞으로 펼칠 공익사업의 지향점으로 제시했다. 돈 쓰는 목적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이종환 회장도 이 대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서구 언론들은 이런 자선자본주의가 정당한가를 놓고 갑론을박 중이다. 민주적 의견 수렴 과정을 통해 세워야 할 사회적 어젠다를 개인이 돈으로 만드는 게 과연 옳으냐가 핵심이다. 젊은 IT(정보기술) 부호들마저도 자산 증식과 사업 확장에 골몰하는 모습을 줄곧 봐 온 한국인들에게는 생경한 일이다. 언젠가는 우리에게도 이런 논쟁이 벌어지는 날이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