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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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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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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8~9년 전쯤 사립학교에 한번 보내볼까 생각한 적이 있다. 학비는 비싸지만 엄마 손이 좀 덜 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립 초등학교는 한날한시에 입학 추첨을 하는 데다 추첨일에 입학할 아이를 꼭 동반해야 하기에 중복 지원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학교마다 경쟁률이 꽤 세서 떨어질 확률은 아주 높다. 만약 떨어진다면 아이한테 뭐라고 설명을 하지. 지원한 학교에 애 손 붙들고 도착한 후에야 문득 이런 불안이 엄습해 왔다. 태어나서 처음 가게 될 학교인데, 엄마가 공을 잘못 뽑아 시작도 해보기 전에 떨어졌다고? 실력이나 노력과 무관하게 순전히 운이 나빠서 기회를 놓친 거라고?

 다행히 내 손으로 ‘잘못된’ 색의 공을 뽑기 전에 “(지원한) A학교와 (동네의) B학교 둘 중 어느 학교를 가느냐를 결정하는 자리”라고 ‘거짓말’한 덕분에 아이는 “B학교에 다니게 됐다”며 기쁜 마음으로 동네 공립학교를 잘 다녔다.

 추첨으로 아이의 인생 경로가 달라지는 경험은 이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시작이었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사립초는 물론이요, 국제중과 자율형 사립고 등 주요 고비고비마다 내리는 모든 선택의 결과가 실력이나 노력보다 운에 더 좌우된다. 잘 뽑으면 붙고 못 뽑으면 떨어지니까. 수능시험조차 알고 보면 복불복이다. 매년 선택과목 사이의 난이도 조절 실패로 어떤 과목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똑같이 만점을 받아도 표준점수 차이가 10점 이상 벌어지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인가. 남자 아이들은 군대 갈 때도 의무경찰이나 카투사(주한미군 부대의 한국인 병력)에 지원하면 어김없이 추첨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로또 당첨만큼 들어가기 어렵다는 요즘의 국공립 유치원 추첨 대란을 겪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렇게 ‘운빨’로 모든 게 결정되는 걸 계속 지켜봐야 하다니 한숨만 나온다. 머리가 클 대로 큰 아이에게 통할 거짓말도 이젠 없는데, 노력보다 운이 더 중요해진 세상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걸까.

 무슨 과목을 선택하든 점수 나온 대로 인정받고, 성적순으로 당락이 결정되고, 좀 불편하긴 해도 선착순에 맞춰 부지런 떨고 좀 기다리면 가능하던 유치원 입학 등이 어느 순간 운의 경연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야말로 로또 인생인 셈이다.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며 도입한 추첨제가 모두를 불만스럽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