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차 막은 '겹주차' 아파트 화재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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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아파트에 불이 났으나 단지 내 이중 주차된 차량들 때문에 소방차의 진입이 늦어져 사상자가 11명이나 되는 큰 사고로 번졌다. 게다가 위층으로 대피한 주민들은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잠겨 있어 질식해 쓰러지는 사태도 빚어졌다.

겹주차에 소방차 못 들어가=26일 오전 6시쯤 서울 송파구 오금동 H아파트 南모(61)씨 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南씨의 아들(28)이 숨지고 南씨 등 가족 3명과 위층 주민 7명 등 10명이 다쳤다. 불이 나자 소방차 23대와 소방관 75명이 출동했으나 겹겹이 주차된 차량들로 소방차 진입이 어려워 진화까지 50여분이 걸리는 바람에 인명 피해가 컸다.

관할 송파소방서는 먼저 계단으로 소방관들을 올려 보내 소화전으로 불을 끄기 시작하면서 주차 차량들을 일일이 빼낸 뒤 현장 도착 25분 만인 6시40분쯤 불이 난 아파트 앞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곳도 이중으로 주차된 차량들 때문에 고가사다리차를 쓸 수 없어 소방관들이 옥상과 화재 현장에 올라가 주민을 하나씩 구조했다. 그 사이 허약한 노인과 여성들이 연기에 질식해 쓰러졌다.

송파소방서 측은 "진입로를 확보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뺏겨 초기 진화에 실패해 많은 사상자가 났다"고 말했다. 南씨는 "연기가 난다는 경비원의 연락을 받고 작은 방 문을 열어 보니 아들이 선풍기를 틀어놓은 채 잠들어 있었고, 책상 아래 전기 콘센트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불길이 너무 거세 등과 허리에 화상을 입고 아내와 함께 간신히 빠져 나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일단 전기 누전이나 합선으로 불이 났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아파트 재난 무대책=전문가들은 아파트의 엉성한 재난 관리와 기본적인 주차 규정을 지키지 않은 주민들의 자세가 화를 키웠다고 지적했다.

송파소방서 박충권 정보팀장은 "불이 난 아파트는 1천여가구가 사는 대규모 단지임에도 지하 주차장 시설이 없었다"며 "그 때문에 주민들이 주차구획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단지 진입로에 차량을 빼곡히 주차, 소방차 진입로가 확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지어져 20년 가까이 된 이 아파트는 유사시 비상대책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한 경비원은 "복도에 소화기 몇대만 비치해 뒀을 뿐, 고층에서 불이 났을 경우에 대비한 비상탈출 계획 등은 없다"고 말했다.

게다가 불이 난 아파트는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모두 잠겨 있어 일부 주민은 위쪽으로 대피했다가 소방관이 도착하기 전에 질식해 쓰러졌다. 송파소방서 측은 "화재 진압과 주민 구조 과정에서 닫혀 있는 옥상 문을 부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말했다.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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