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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이재용은 어디까지 변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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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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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논설실장

이건희 삼성 회장 하면 떠오르는 어록은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꾸라”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그때까지의 ‘양’ 위주에서 ‘질’ 중심으로 경영 방향을 확 바꾸었다. 여기까지는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회장의 새로운 구상이 하루아침에 완성된 건 아니다. 삼성그룹 핵심 인사들은 1987년 12월 1일을 잊지 못한다. 이건희 회장은 고 이병철 회장이 작고한 이틀 뒤인 11월 19일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신임 회장으로 추대된 데 이어 공식 취임한 날이다. 당시 이 회장은 46세.

조용히 진행되는 새로운 명예혁명
신경영에 버금갈 근본적 변화 절실

 취임사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창업주의 유지를 계승해 사업보국·인재제일·합리추구의 경영이념을 더욱 발전시키겠다”고 했다. 다음은 그 다음 장면을 더듬는 삼성 핵심 인사들의 기억이다. “호암아트홀의 취임식이 끝난 뒤 회장 집무실에 핵심 사장들과 비서실 관계자들이 모였어요. 이 회장은 소파 옆의 냅킨을 한 장 꺼내더니 반을 접고, 또 반의 반을 접고 이렇게 말했어요. ‘선대 회장께선 이런 관리의 삼성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냅킨을 갑자기 갈가리 찢으면서 ‘저는 삼성을 이렇게 확 바꿀 생각입니다’라고 했어요.” 취임사 귀퉁이의 ‘오는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 초일류로 성장시키겠다’ ‘제2 창업에 나서겠다’는 다짐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습니다.

 이번 삼성 인사를 놓고 ‘이재용식 명예혁명’이라는 평가가 대세다. 변화와 안정을 배합했다는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나이는 이미 47세. 투병 중인 이 회장을 대신해 삼성의 실질적 리더를 맡고 있다. 당초 삼성 내부에선 이번에 징검다리로 실질적 지주회사인 삼성물산·제일모직 통합법인의 회장 추대를 고민했으나 이 부회장이 “그런 말조차 나돌지 말게 하라”며 단칼에 잘랐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그동안 “경영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내가 피곤하다고 불평할 자격이 있겠는가. 운 좋게 좋은 부모, 훌륭한 선배(경영인)들을 많이 만나 이 자리에 있다”며 몸을 낮춰 왔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주도하는 삼성의 변화는 현재진행형이다. 겉으로는 방위산업과 화학 계열사들의 매각이 가장 눈에 띈다. “이제는 잘하거나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더 잘해야 하는 시대”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부회장이 집중하는 분야는 반도체·바이오시밀러다. 삼성의 경쟁력이 뛰어난 생산관리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속한 의사 결정-빠른 효율적 생산라인 구축-높은 수율이 뒷받침돼야 하는 업종이다. ‘공대의 경영학과’이자 생산관리가 주무기인 산업공학과 출신이 중용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삼성은 전자부품과 센서가 핵심인 전기차(자율주행차)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고 있다.

 삼성 내부 인사들이 ‘이재용식 명예혁명’의 폭과 깊이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삼성은 방산 계열사들을 매각하면서 전용기 3대와 헬기까지 모두 팔아넘겼다. 이 부회장도 꼭 필요한 해외 출장에는 전세기를 이용한다. 전세기 스케줄이 맞지 않으면 민간 여객기의 비즈니스석을 주로 탄다. 상가 조문 등 외부 행사에도 수행비서 없이 혼자 다니는 경우가 흔하다. 그룹 내부에서 “혹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라고 가슴을 졸일 정도다. 그동안 전용기나 일등석을 애용해 온 삼성 최고경영진도 가시방석일 수밖에 없다. 이 부회장의 실용주의가 소리소문 없이 조용한 변화를 부르고 있는 중이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직전 6년 동안 식은땀이 흘러 잠을 못 자는 바람에 몸무게가 10kg이나 줄었다. 지금 삼성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나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사태에 대비해 몸 만들기에 들어갔다. 이미 미국의 IT 골리앗들은 넘보기 어려운 아성을 구축했고, 중국은 샤오미 열풍으로 추격이 한창이다. 여기에 한국 경제는 저성장·저출산의 늪에 빠졌다. 이 부회장이 다시 한번 삼성의 변화를 주도하고 나섰다. 앞으로 어디까지 변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이건희 회장의 “앞으로 10년 안에 현재 삼성의 주력사업들은 모두 사라질 것”이란 마지막 경고를 잊지 말았으면 한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