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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인플레 트라우마’에 돈 풀기 거부감 … EU 경제 회복 더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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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 몬티 총장(오른쪽)과 사공일 고문이 지난달 20일 스위스 몽트뢰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테러?난민 사태로 얼룩진 유럽?글로벌 경제를 놓고 대담했다. 몬티는 “파리 테러가 장기적으론 유럽 통합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몽트뢰=한불네트워크 이순영]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보코니대학 총장은 금융이론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독점적인 금융회사 행태를 설명할 수 있는 ‘클라인-몬티 모델’의 주인공이다. 동시에 그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1995~2004년), 이탈리아 재정위기 순간 총리(2011~2013년)를 지냈다. 학자와 경세가(經世家)라는 두 날개를 갖춘 인물이다. 사공일 본사 고문 겸 세계경제연구원(IGE) 이사장과 몬티 총장은 지난달 말 스위스 몽트뢰에서 열린 세계정책포럼(WPF)에 발표자로 함께 참석한 뒤 유럽의 테러와 난민 사태, 글로벌 경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주했다.

세계 경제의 길 <4부> 사공일이 만난 석학 ③ 마리오 몬티 보코니대학 총장

독일 재정지출 안 늘리는 까닭
1차 대전 직후 살인적 인플레 악몽
부채엔 ‘유죄’ 뜻도 … 빚내길 꺼려

파리 테러, EU 단합시킬 수도
회원국끼리 정보 교환 긴밀해져
IS 공습 프랑스 재정악화 불가피

 ▶사공=EU 경제 대부분이 미미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아직도 회원국 대부분은 7년 전 재정위기 이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프랑스 파리 테러 사태가 벌어졌다. 북아프리카와 시리아 등 중동발 난민 사태도 이어지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테러와 난민 사태가 EU의 미래와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몬티=과거를 돌이켜 보면 EU는 위기 속에서 성숙했다. 달리 말해 위기 속에서 회원국의 정책 협조와 협력이 강화돼 왔다. EU 자체가 제2차 세계대전을 딛고 출범했고 유로화도 80년대와 90년대 외환위기를 바탕으로 해 출범하지 않았는가.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의 위기 상황이 EU의 발전에 장애가 되기보다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본다.

 ▶사공=긍정적으로 작용한다면 EU뿐 아니라 세계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지 여정은 험난할 듯하다.

 ▶몬티=나도 힘든 과정이 될 것으로 본다. EU와 미국 등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에서 (리더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일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인기영합주의와 민족주의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한 결정을 내리기는 더욱 어렵다.

 ▶사공=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EU 내 자유로운 이동을 약속한 솅겐조약과 경제 안정·성장에 관한 약속인 마스트리흐트조약이 난민과 테러 사태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

 ▶몬티=파리 테러 사태가 단기적으론 솅겐조약엔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테러를 계기로 회원국이 더욱 긴밀하게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게 될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공=그럼 마스트리흐트조약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파리 테러 이후 프랑스 정부는 이슬람국가(IS)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습하는 등 국방과 치안 지출을 크게 늘리고 있다. 그 바람에 재정적자가 악화되고 있다. 프랑스가 이전에도 마스트리흐트조약이 정한 재정적자 한도를 지키지 못해 예외 인정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예외적 상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몬티=테러 사태 때문에 프랑스 재정적자 악화를 예외로 봐줘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선례가 되기 때문에 예외 인정이 쉽지는 않다. 이참에 경제위기 대응과 경제적 합리성 차원에서 마스트리흐트조약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본다. 회원국 차원에서 필수적인 공공투자 등을 재정적자 예외로 인정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사공=공공투자는 주로 인프라 투자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몬티=그렇다. 도로·항만 같은 하드웨어적인 인프라뿐 아니라 정보통신고속도로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인프라 투자도 포함된다.

 ▶사공=이번 사태가 EU 앞날에 도움이 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제 EU 경제 상황을 한번 살펴보자.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양적완화(QE) 확대를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두 석학의 대담은 지난달 20일 이루어졌다. ECB는 지난 3일 양적완화 규모를 확대하지 않고 단순히 기간을 2017년 3월까지 6개월 연장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공 고문의 질문은 이 결정이 이루어지기 전에 나온 것이다.)

 ▶몬티=드라기 총재의 결단과 리더십 덕분에 ECB는 EU 경제회복에 도움이 되는 QE 등 훌륭한 정책 수단으로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해왔다. 하지만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회원국이 구조조정 노력을 충분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QE를 확대하면 위험이 따른다고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QE 확대 때문에 개별 회원국이 구조조정을 하게 하는 정치적 압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사공=그 점에 대해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QE 확대가 빚을 많이 짊어진 나라의 부채를 더욱 늘어나게 해 미래 위기의 씨앗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민스키 효과(Minsky effect, 미 경제학자 하이먼 민스키가 지적한 부채 버블 현상)’가 현실화할 수도 있을 듯하다. 요즘 이탈리아 경제는 어떤가.

 ▶몬티=이탈리아 경제에 대해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이탈리아는 남유럽 국가 가운데 재정위기 동안 EU나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지 않았다. 둘째, 프랑스를 포함한 남유럽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마스트리흐트조약이 규정한 대로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재정적자를 유지하고 있다.

▶사공=그런 결과는 당신이 총리직을 역임할 때 여러 가지 정치적 어려움을 이겨내며 연금 개혁 등 구조 개혁을 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몬티=과찬이다. 연금 개혁은 아주 과감했다. 2012~2020년 사이에 800억 유로를 절감한 것이다. 그런데도 나도 많은 일을 했지만 현재 마테오 렌치 정부도 구조조정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사공=이탈리아의 노동시장 개혁은 어떤가. 독일이 과거 ‘어젠다 2010’과 같은 노동개혁을 추진했다는 점과 견줘 이탈리아의 노동시장은 얼마나 개혁됐는가.

 ▶몬티=내가 보기에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한 만큼 이뤄지지 않았다. 독일의 경험 등에 비춰 노동관계법을 잘 제정했다고 해 충분한 것은 아니다. 열쇠는 바로 법을 얼마나 잘 집행하는지 여부다.

 ▶사공=그리스 상황을 좀 살펴보자.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올해 국민투표를 강행했을 때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가 정치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많은 경제 전문가는 유로존 탈퇴가 그리스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리스는 현재 조용하다. 요즘 그리스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몬티=한마디로 그리스 국민 대다수(75~80%)와 정치 지도자들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원치 않는 게 분명하다.

 ▶사공=그리스 국민의 여론이 그렇다는 말인가.

 ▶몬티=맞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 국민의 여론은 아주 성숙돼 있다. 그들이 유로화를 채택하면서 지켜야 할 여러 조건이나 제한이 있는데, 이런 외부적인 압박이 없었다면 그리스가 닻도 없이 에게해(海) 물결을 따라 표류하는 작은 배 신세라는 점을 그리스인들은 잘 알고 있다.

 ▶사공=GDP의 거의 200%에 이르는 그리스 국가부채를 일부 조정하는 일은 불가피한 것 아닌가.

 ▶몬티=나는 단순한 헤어컷(원리금의 부분적인 탕감)이 아닌 진정한 부채 구조조정(경제 정상화와 상환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원리금 탕감과 만기, 이자율 조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공=시선을 독일로 돌려보자. 독일의 현재 흑자는 GDP의 8%를 웃돌고 있다. 그래서 독일이 EU 경제의 회복을 위해 정부 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문가가 많다.

 ▶몬티=그렇다. EU집행위원회가 나서 독일 경상수지 흑자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나도 독일의 지나친 경상수지 흑자 문제를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귀띔해준 적이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대담하기 직전의 일이다. 내가 보기에 독일 국민과 메르켈 총리 등 정치 리더들은 경제를 ‘도덕적 철학(moral philosophy)’ 차원에서 본다. 경제성장을 ‘도덕적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본다는 얘기다. 그 바람에 경상수지 흑자를 줄이라는 외부 압력이 잘 먹혀들지 않는다. 그들은 지나친 흑자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무역 불균형이 역내 경제와 교역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을 개의치 않는다).

 ▶사공=아주 흥미로운 분석이다. (당신의 얘기가) 오바마 대통령이 메르켈과 회담할 때 좋은 참고가 됐을 것으로 본다.

 ▶몬티=독일어로 부채는 ‘Schuld’다. 이 단어엔 부채란 뜻 말고도 유죄라는 의미도 있다.

 ▶사공=또한 독일인들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주 큰 것도 사실이다. 1920년대(제1차 세계대전 직후)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겪은 탓이다. 그 바람에 독일인들은 정부의 씀씀이를 늘려 총수요를 증가시키는 일에 대해 뿌리 깊은 거부감이 있다. 그래서 EU 전체를 위해 독일이 지출을 늘리는 걸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일부 독일 전문가들은 자국 정부가 재정적자를 낼 정도로 지출을 많이 하는 건 법적으로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저런 점에 비춰 유럽 경제가 ‘겨우겨우 버티는 수준(muddling through)’을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몬티=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독일의 공공지출 거부감 등을 감안할 때 유럽 경제가 당분간 지지부진할 전망이다. 하지만 유럽 체제 차원에선 2010년 그리스 재정 위기 이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특히 안정화와 재정에 관한 새로운 룰이 마련됐다.

 ▶사공=그것 외에도 중요한 진전은 은행연합(banking union) 차원에서도 많이 이뤄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은행연합이란 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지 않는가.

 ▶몬티=물론이다. 그러나 유럽 통합을 위해 가야 할 길은 멀다. 나는 느리게나마 계속 진전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

 ▶사공=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신은 EU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데, 이 예측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란다.

정리=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Mario Monti 마리오 몬티

1943년 이탈리아 바레세 출생
이탈리아 보코니대 총장
이탈리아 총리(2011~2013년)
이탈리아 경제재정장관
(2011~2012년)
EU 공정경쟁 정책위원
(1999~2004년)
이탈리아 보코니대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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