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커버스토리] 눈물겨운 금연투쟁 온식구가 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3면

이화덕(43·경기 수원시)씨는 이달 들어 담배를 끊었다. 건강? 건강은 아직 말짱하다. 문제는 세 딸이다.

큰 딸 수빈(17)이는 올들어 거의 날마다 편지 공세를 퍼부었다. ‘딸들을 사랑한다면 끊어 달라’는 눈물 어린 호소다. 둘째 예빈(13)이는 더 적극적이었다. 가족 사진을 코팅해 아빠의 담뱃갑 뒤에 끼워 넣었다. 이씨가 새 담배를 살 때마다 사진을 갈아 끼운 것은 물론이다.

‘담배를 태우는 건 가족을 태우는 것’이란 경고 문구도 넣었다. 늦은 밤 현관문 여닫는 소리가 날 때마다 뛰쳐 나와 아빠의 ‘도둑 담배’를 감시하기도 했다.

막내 보배(6)가 택한 작전은 무기한 뽀뽀 파업. “담배 냄새 없어질 때까지 아빠와는 뽀뽀 안 한다”고 선언했다. 서툰 솜씨로 ‘담배를 몰아내자’는 내용의 포스터와 수수깡 푯말을 만들어 온 집안에 붙이고 세워 놓았다.

6개월에 걸친 딸들의 협공에 이씨는 급기야 “내가 담배 피우다 걸리면 너희들 아빠가 아닌 아들”이라며 백기를 들었다. 딸들의 뒤에 치밀한 전략가인 아내 황경숙(43)씨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김서현(13.서울 목동)양은 석달째 아빠(49)에게 e-메일 공세를 퍼붓고 있다. 암세포가 퍼진 폐의 사진을 보내는가 하면 니코틴 패치.껌 등 금연 보조제의 효과를 소개하기도 한다.

전문적인 내용이 제법 많이 들어 있어 중학교 1학년의 메일로 보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서현이의 가장 큰 무기는 전문 지식이 아니라 애교 섞인 협박이다.

'나보다 담배가 더 좋아?' '내가 담배 피우면 아빠는 좋겠어?' 등등. 서현이는 최근 '기말 고사에서 반 1등을 하면 진짜 끊겠다'는 아빠의 약속을 받아내고 평소보다 더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남 순천의 봉화초등학교는 학교 전체가 담배와의 전쟁에 나섰다. 전교생 9백여명 모두가 '금연 도우미'다. 지난 2년 동안 담배를 끊은 아빠들은 1백69명.

아이들이 사용한 방법은 끈질긴 홍보다. 우선 아빠들이 집에서 담배를 피울 만한 장소인 베란다와 화장실에 손수 만든 금연 포스터를 붙였다. '밖에 나가면 모르겠지'라는 생각으로 현관문을 나서도 소용 없다.

아파트 복도와 동네 전봇대에까지 포스터는 붙어 있었다. 출근하는 아빠의 호주머니에 '오늘도 금연'이라는 쪽지를 넣고, 직장에 전화를 걸어 점검을 하는 등 대문 밖 감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학교 박춘석(53)교사는 "우리 아빠 암으로 죽으면 어쩌냐고 울며 매달리는 자녀를 보고 더 버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며 웃었다.

성공 못한 아빠들도 흡연량만큼은 크게 줄었다. 서용근(37.순천시 조례동)씨는 지난해 아이들 등쌀에 두 달 정도 끊었다. 결국 다시 피우고는 있지만 하루 한갑에서 반갑으로 줄었단다. "애들은 지금도 끊은 줄 알고 있다"는 그는 "이 기사 나가면 도리없이 다시 금연해야 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중국 작가 린위탕(林語堂)은 1938년 출간한 '생활의 발견'에서 "담배를 즐겨 피우는 사람은 절대로 아내와 다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다.

송민화(29.경기도 안양시)씨는 담배를 끊지 못하는 남편(29)과 다투다 못해 아직 생기지도 않은 둘째아이까지 동원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자동차 바꿔주면 끊겠다"던 남편이 새 차를 산 지 1년이 다 되도록 금연을 시도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아서다. 송씨는 남편에게 "금연 없이 임신 없다"고 선언했다. 매일 둘째, 둘째 하던 남편은 "당장 이달 안에 끊겠다"고 항복했다.

일단 가장이 '끊겠다'는 결심을 한 뒤에는 가족들의 이해와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난해 말부터 6개월째 금연 중인 회사원 장재호(30.대구시 봉덕동)씨는 지금도 몇달 전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심한 금단 현상을 못 견디고 온갖 짜증을 부려도 다 받아준 아내가 고맙고 미안해서다.

그는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냉장고 문을 열어 보고 "끓여 놓은 물이 없다"며 한바탕 소동을 벌인 일을 가장 쑥스럽게 생각한다. 장씨 가족은 늘 생수를 사다놓고 마셨지, 물을 끓여먹어 본 적이 없었다. 장씨는 그야말로 생트집을 잡았던 것이다.

담배로 몸에 탈이 난 사람들은 '진작 가족들 말을 들을 걸'하는 후회가 가장 먼저 든다고 말한다. 충북 청주에서 PC방을 운영하는 박세양(50)씨는 올 2월 폐기종(폐가 늘어나 호흡 곤란을 느끼는 질환) 판정을 받았다.

그는 "대학생인 딸이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끊으라고 할 때 들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박씨는 자신의 PC방 전체를 금연 구역으로 만들었다. 손님은 30% 이상 줄었지만 자신과 종업원.손님들의 건강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익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서울 금호동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강미자(60)씨는 손님들이 담배를 빼 물 때마다 뜯어 말리기 바쁘다. 40여년간 담배를 피웠던 그의 남편(63)은 4년 전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폐의 반을 잘라냈다. 이후 5분 이상 말을 잇기도 힘든 남편을 돌보며 강씨는 하루 17시간씩 식당 일을 꾸려가고 있다.

그는 "남자들이 가족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리 쉽게 담뱃불을 붙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땅의 모든 남편.아빠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김선하 기자
권혁재 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