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세상읽기

한·미·일은 학문의 자유를 존중해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2면

김회룡
김회룡 기자 중앙일보 차장
기사 이미지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최근 몇 년간 세계 도처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위협받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미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 됐다. 주요 사례는 권위주의 정권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발견된다.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법에 따라 외국의 재단 또는 인권 단체와 어떤 연관이 있거나 후원을 받는 비정부기구(NGO)는 해산될 수 있다. 중국에서도 NGO법 시안에 따르면 모든 시민사회 단체는 의무적으로 등록해야 하며 활동에 대한 모니터링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단체의 활동이 심각하게 제한되거나 활동 자체가 중단될 수밖에 없다. 점점 많은 수의 중국 대학 강의실에 카메라가 설치되고 있다. 학생들이나 교수들이 당의 노선으로부터 이탈하는지 감시하려는 국가안전부나 공산당의 편의를 돕기 위해서다. 또 중국의 대학 교수들은 해외 학술 행사에 참가하기 위한 허가를 받는 게 더 어려워지고 있다.

좌우 양쪽이 학문 자유 위협
한·미·일 학자들 대화가 절실

 이런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언론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미국·일본·한국에서 민주적인 사회가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에 대해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기사 이미지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미국의 경우 학문의 자유에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사회 운동이다. 운동가들은 특정 소수 그룹에 비판하는 견해를 표명하는 학자나 학생을 응징하려고 한다. 미국 대학 캠퍼스에는 당연히 혐오 스피치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가 설 땅이 없다. 하지만 대학에서는 동시에 다양한 시각의 공존을 위한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 절충주의적인 사고를 교환하는 것은 인문교육의 핵심이다. 이념의 강요나 암기식 교육은 절대로 고등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최근 예일대와 미주리대에서 발생한 항의 시위에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까지 참여했다. 시위는 다른 대학으로 확산됐다. 이들은 인종이나 종교, 남녀 성별상의 차이를 등을 이유로 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교수나 학생들에게 의무적인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문제는 일부 민감한 주제를 수업에서 다룰 수 없게 하려는 학생들과 일부 행정가의 요구다.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처음에는 공감을 얻었지만 무리한 요구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좌파가 학문의 자유에 위협을 가하는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경우 위협의 진원지는 극우 세력이다. 아사히(朝日)신문의 기자였던 우에무라 다카시(植村隆)는 호쿠세이가쿠엔(北星學園)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이후부터 끊임없이 극우파의 위협을 받았다. 우에무라의 글은 일본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그의 가족이 위안부 여성들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우에무라의 실증적인 연구서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아사히신문은 우에무라가 아사히신문에서 기자로 근무할 때 위안부에 대한 팩트를 날조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우에무라와 호쿠세이가쿠엔 대학은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폭발물 위협까지 있었다. 우에무라가 한 여자대학으로 옮기려 했지만 위협이 계속됐고 대학 측은 결국 우에무라를 채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에무라는 한국 가톨릭대 초빙교수가 됐다.

 한국에서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를 서울동부지검이 지난달 18일 기소했다. 그의 책 『제국의 위안부』가 허위 사실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게 이유다. 검찰 관계자는 박 교수가 “학문 자유의 경계를 일탈했다”고 말했다. 세계의 학자들은 박 교수가 제시한 사실의 정확성에 대해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는 끊임없이 연구되고 수정되고 재해석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정부는 역사적인 진실을 소유할 수 없다. 얄궂게도 박 교수 책의 일본어판을 발행한 곳은 좌파 성향인 아사히신문이다.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비판한 우에무라의 전 고용주인 바로 그 아사히신문인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사례는 각기 다르다. 미국 대학 캠퍼스의 항의 시위는 그 자체가 언론 자유의 표현이다. 시위의 요구나 그 결과가 학문의 자유에 필요한 공간을 좁혔지만 말이다. 일본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한 우익 활동가가 폭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말도 안 된다. 일본의 학자들이나 정치 지도자들은 이러한 위협을 공개적으로 단죄하는 용기를 보여줘야 한다. 한국의 검사들은 위안부 여성들을 위해 박 교수를 기소했다. 위안부 여성 편에 서는 것은 숭고한 일이다. 하지만 검사들의 방식은 학문의 자유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졌다.

 한·미·일 3국 사례의 공통점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의 연구나 민감한 주제에 대한 시민사회의 토론에 덜 관용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다는 것이다. 슬프고도 얄궂은 일이다. 정부와 정치 지도자들은 가장 민감한 사안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미국의 인종 문제이건 한·일 간 역사적 갈등이건 말이다. 이런 때일수록 학자들은 상호 이해를 증진하기 위한 토론을 주도해야 한다. 권위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한·미·일 3국을 지켜보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학문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aseokim@joongang.co.kr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