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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는 세계 석유 지도] 국제 에너지 질서 '미국 손안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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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세계 석유 지도가 미국의 주도로 새롭게 그려지고 있다. 신 국제 에너지 질서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 이어 올 5월 이라크를 점령하면서 안정적인 석유 공급 라인과 공급원을 확보했다. 이라크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아프가니스탄은 유전지대인 카스피해 연안.중앙아시아에서 인도양의 해상수송로로 가는 길목이다.

신 국제 에너지 질서=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확보는 미국이 국제에너지 질서의 목줄을 쥐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국제유가를 통제해온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제치고 직접 세계 에너지 질서를 좌우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한 것이다. 석유수출이 경제의 젖줄인 러시아나, 경제개발로 석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국이 이라크전 이후 미국에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최근 이라크전의 주목적이 석유라고 솔직하게 밝혔다. 그는 지난 4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2차 아시아안보회의(ASC) 연설에서 "이라크는 석유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며 "경제적으로 미국이 이라크에 대해 다른 선택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딕 체니 미 부통령이 91년 주도한 '국가에너지 전략보고서'는 에너지 안보를 미국 외교순위의 최우선 순위에 둘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미래 에너지원 확보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의 주요 국가전략으로 자리잡았다. 이 보고서가 주요 석유전략지역으로 꼽은 중동.카스피해연안.서남아프리카(나이지리아) 중 미국은 이미 두 군데를 장악했다.

석유 창고 이라크.이란=미국이 구축하고 있는 새로운 국제 석유 질서의 중심은 이라크와 이란이다. 미국의 싱크탱크인 우드로 윌슨센터의 리 해밍턴 소장은 '오늘의 불량국가가 내일의 핵심 에너지 공급원?'이라는 논문에서 미국은 적대적인 이라크.이란에 미래의 에너지를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두 나라는 전 세계에서 확인된 석유 매장량의 20%를 보유하고 있다. 이라크가 11%이고 이란이 9%다. 반면 미국.영국 등 서방과 러시아 등 옛 소련국가의 매장량을 다 합쳐도 17%에 불과하다.

생산량을 보면 전 세계 매장량의 2%에 불과한 영국의 북해유전에서 생산량의 9%를 퍼올리며 확인 매장량의 6%가 묻힌 옛 소련 지역에서 생산량의 10%가 나온다. 반면 이라크는 전 세계 생산량의 3%를, 이란은 5%만 퍼올린다. 매장량이 적은 서방과 옛 소련의 원유 생산량이 이라크.이란보다 훨씬 많아 먼저 바닥이 날 처지다.

그런데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은 세계 에너지의 25%를 소비한다. 미 에너지정보국(EIA)에 따르면 미국의 에너지 소비는 2020년까지 20%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2001년의 '국가에너지 전략보고서'는 앞으로 20년간 미국의 석유생산은 해마다 12%씩 줄어 현재 50% 정도인 석유 수입 의존도가 2020년에는 70%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EIA는 202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소비가 50% 늘 것으로 예상했다. 2020년의 에너지 구조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37%에 이른다. 따라서 앞으로 중동 이외의 석유가 고갈되면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이라크와 이란의 석유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석유 통로 아프가니스탄=각종 보고서는 카스피해 지역에 최대 2천억 배럴의 석유가 묻힌 것으로 추정한다. (이란의 확인 매장량이 9백억 배럴) 이 지역 최대의 바쿠유전이 있는 아제르바이잔은 서방의 메이저 석유사들이 5백억달러가 넘는 채굴계약을 통해 자본력으로 장악했다. 문제는 운반이다. 이곳은 내륙이어서 항구까지 송유관을 연결해야 한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 따르면 서방과 아제르바이잔은 서방과 송유관 컨소시엄을 만들어 바쿠~그루지야~터키의 제이한(지중해)을 거쳐 해상 수송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면서 바쿠~카스피해 해저~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해상수송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대안이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유의 하나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제 미국엔 중동과 카스피해를 잇는 석유전략의 최고 요충지 이란이 남았다. 미국의 선택이 주목된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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