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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엔 무관심… 문화 품격 지키는 ‘올바른 서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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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호 26면

“트론스모를 통해 세계를 읽는다.” 노르웨이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인문학 책들을 비치하고 있는 트론스모서점. 지하는 세계 고전만화들의 전용공간이다.

주소 Universitetsgata 12, 0164 Oslo, Norway전화 +47 22 99 03 99 www.tronsmo.no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는 단풍으로 물들었다. 그날 저녁 오슬로 시민들의 사랑방 트론스모서점에서는 소설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젊은 후배작가 케넷 뫼와 토크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총 6권 3600쪽이 넘는 대작 『나의 투쟁』으로 세계문단을 발칵 뒤집어놓고 있는 크나우스고르가 케넷 뫼의 데뷔작 『불안』을 격려하는 이벤트였다.


오슬로의 명문출판사 옥토버가 펴낸 『나의 투쟁』은 전 세계에 ‘크나우스고르 현상’을 일으키는 문제작으로 평가되면서 현재 32개 나라에서 출판되었거나 번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나는 크나우스고르를 만날 겸 트론스모서점을 취재하러 오슬로에 갔다. 노르웨이의 지식인·작가들은 새 책을 펴내게 되면 으레 트론스모에서 출판기념행사를 겸한 토크행사를 한다. 젊은 작가들이 트론스모에서 토크행사를 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독자적인 문제 의식으로 책 선정1980년대 초반에 트론스모서점을 방문한 바 있는 미국 시인 앨런 긴즈버그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는 서명을 남겼다. 비트제너레이션을 이끌면서 물질주의와 군국주의, 성적 억압을 반대하는 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긴즈버그의 대표작 『울부짖음』은 현대 미국사회에 대한 격렬한 탄핵이자 통렬한 애가(哀歌)였다. 샌프란시스코의 전설적인 서점 ‘도시의 불빛’과 파리 문예운동의 한 중심인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드나들면서 세계인들에게 평화정신을 각인시킨 긴즈버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오슬로의 트론스모에 주목했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영화작가이며 그래픽 노블 작가인 닐 게이먼도 트론스모를 “세계에서 가장 쿨한 서점”이라고 했다. 2013년에 타계한 미국의 뮤지션 루 리드는 2006년 오슬로에서 공연하면서 그의 사진집 출간행사를 트론스모에서 열었다.


이미 수년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노르웨이의 소설가 욘 포세도 트론스모의 단골독자다. 노르웨이의 왕자와 왕자비도 이 서점을 드나든다. 오슬로대학의 박노자 교수도 일주일에 한 번쯤은 들른다고 했다.


1973년 이바 트론스모의 아이디어로 문을 연 트론스모서점은 이후 진보주의자들의 아지트였다. 뭉크와 입센, 그리그의 문화적·예술적 전통을 창출해낸 노르웨이. 트론스모는 인구 500만밖에 안 되는 나라의 인문적·예술적 담론의 품격을 지켜나가는 문화기구가 되고 있다. 여기에 요한 갈퉁의 평화학이 있다. 갈퉁이 주도한 오슬로의 평화연구소는 1960년대 국제평화연구의 새로운 지평이었다.


매주 목요일에 열리는 대화 모임에는 오슬로의 지식인과 작가가 으레 참석한다. 초기엔 사회주의적인 문제들이 중심주제였지만 최근엔 빈부격차나 사회적 이슈를 담론한다.


트론스모는 처음부터 베스트셀러와는 무관했다. 대형출판사와 서점협회에서 발표하는 베스트셀러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독자적인 문제의식으로 타이틀을 선정해서 비치한다. 노르웨이에는 현재 인터넷 서점 말고 573개의 서점이 있는데, 트론스모는 ‘독립서점’으로서의 문제의식을 한사코 견지하고 있다. ‘오슬로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비치하면서 오슬로 시민들의 문화적 의식에 부응하는 서점이다.


트론스모는 어느 개인이나 회사가 운영하는 서점이 아니다. 100여 명의 주주가 함께 참여하는 문화적 공동체다. 주주들에게 배당 같은 건 물론 하지 않는다. 트론스모의 주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오슬로 시민으로서의 명예와 긍지다. 트론스모에 주주로 참여함으로써 사회·문화적으로 일정하게 기여한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옥토버 출판사와 팜스 출판사도 대주주이지만, 이들도 서점과 지식인 운동을 성원한다고 생각한다.


“트론스모를 통해 세계를 읽는다.”


트론스모가 창립 때부터 내세운 문제의식이다. 정치·사회·역사·국제·경제·라틴아메리카·아시아·중동·문학·예술·논픽션이 트론스모가 구비하는 책의 중심주제다.


“다른 서점에 없는 책들도 트론스모에 가면 만날 수 있다.”


특정 작가의 컬렉션 코너를 설치하기도 한다. 『우체국』과 『여자들』을 쓴 독일 출신의 소설가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들을 모아놓기도 한다.


 

1 12세 때부터 트론스모서점에 드나든 만화작가 라르스 피스케가 새로 이사한 서점 안팎을 장식하는 미술작품을 기증했다.

노르웨이 만화가들의 등용문 역할도트론스모는 ‘노르웨이의 만화가들을 데뷔시키는 서점’이라고도 일컫는다. 지하에는 세계의 고전만화들이 비치되어 있다. 『샌드맨』을 그린 미국의 만화가 닐 게이먼, 『도널드 덕』을 그린 미국의 돈 로사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 물론 노르웨이의 만화작가 리스 마이어의 작품들도 있다.


노르웨이의 중견 만화작가 라르스 피스케는 12세 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트론스모를 찾았다. 지하의 고전만화 코너에 살다시피 하면서 만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만화가로서 그의 생각을 키워준 트론스모의 안팎을 장식하는 작품을 기증했다. 그의 부인 안나 피스케도 남편과 함께 작품을 기증했다.


2014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서점 앞 광장에서 하루 종일 토론하고 낭독하고 음악회도 열면서 ‘책과 정신의 축제’를 펼쳤다. 지식인·예술가·작가·저자들이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독자의 자격으로 축제의 주빈이 되었다.


트론스모는 현관 벽에 흰 종이 한 장을 붙여놓았다. ‘우리 서점에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고 타이핑한 것이다. 일회용 문신, 우표, 자물쇠, 종이 인형, 냅킨, 풀, 호루라기, 장식용 안경, 올림픽 포스터 등 56가지다. 요즘 서점들은 잡화점이 되어가고 있다. 잡화점이 되지 않겠다는 트론스모의 자기천명이다.


트론스모는 인문·문학·예술을 주제로 하는 서점이지만 갤러리와 미술관 역할도 한다. 기증했거나 임대해준 미술·사진 작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노르웨이의 사진작가 비에른 스톨레와 미술가 푸시 바그너의 작품이 걸려 있다. 미국의 여성 로커 패티 스미스의 사진도 걸려 있다. 미술·사진·만화 전시회가 기획된다. ‘모든 사람을 위한 트론스모’에 동의하는 예술가들의 예술정신이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핀란드와 아이슬란드 등 북유럽 국가들이 제정한 ‘노르딕평의회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페르 페터손은 트론스모에서 12년간 근무한 바 있다. 그는 트론스모에서의 경험을 그의 작품 『항적』(航跡)에 쓰고 있다. 에세이집 『문 위에 걸린 달』에서도 그 풍경을 그린다. 페터손은 새 책을 낼 때마다 트론스모에서 신간 출시 행사를 한다.


헨릭 호블란과 토릴 코프가 함께 제작한 그림책 『요한네스 옌센』 시리즈의 주인공인 악어 요한네스 옌센이 사랑에 빠진다. 트론스모가 그 현장이다.

2 트론스모는 입구부터 노르웨이 작가들의 작품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

시민 힘으로 건물 철거 위기 넘겨지난 3월 트론스모가 세들어 있는 건물의 주인이 그 자리에 쇼핑몰을 새로 짓겠다고 결정하자 작가·지식인·예술가·독자들이 연대하여 ‘모든 사람을 위한 트론스모’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온라인에서 금세 시민문화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작가 페르 페터손과 스테펜 크베르렐린, 톰 에겔란과 에릭 포스네스 한센이 나섰다. 라르스 피스케 부부 등 아티스트들, 문화·예술 관계자들과 언론인들이 나섰다. 출판사 카펠렌 담과 아스케하우그, 윌렌달, 옥토버가 참여했다.


트론스모의 어려움을 들은 독자들이 페이스북에 ‘트론스모를 지키는 사람들’을 만들었다. 며칠 사이에 1만 명을 넘어섰다. 라르스 피스케는 일간신문 『닥스아비센』의 문화면에 일러스트를 실었다. ‘멍청이들의 도시(Idiotby)’라는 제목을 달았다. 트론스모 살리기 운동에 서명한 시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 남성독자가 트론스모에 와서 1000크로네(약 14만 원)를 주고 갔다. 한 여성독자는 2000 크로네를 주고 갔다. 경영진들은 이름도 모르는 독자들의 성원에 감동했고, 백방으로 서점 살리기를 모색했다. 여기에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문화재단 ‘프릿 오르(Fritt Ord·자유어)’재단에서 50만 크로네(약 7000만 원)를 트론스모에 기부했다. 프릿 오르 재단은 노르웨이의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문화·언론단체를 후원하고 있다. 오슬로 문학회관도 프릿 오르의 후원을 받아 운영한다.


1999년에도 트론스모는 부도 위기를 당했다. 그러나 독자들과 사회단체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이겨낸 바 있다. 트론스모를 아끼는 시민들의 지극정성이 참 대단하다.


트론스모는 지난 9월 독자와 저자, 작가와 예술가들의 성원으로 오히려 더 크고 좋은 공간으로 이전할 수 있었다. 미술가들이 자원하여 새 서점의 안팎을 꾸며주었다. 시민들의 격려 메시지가 쇄도했다.


 

트론스모를 20년째 경영하고 있는 에바 스텐룬 토르센.

신진 작가 위한 굵직한 행사도 기획트론스모가 새로 이전한 유니베시텟츠가텐은 더 문화적인 거리가 되었다. 인근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고서점과 큰 체인서점이 어우러져 책의 거리가 되었다. 책을 사랑하는 시민들이 나들이하는 코스가 되었다.


트론스모를 경영하고 있는 에바 스텐룬 토르센은 어릴 때부터 책벌레였다. 러시아의 불가코프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엘리아스 카네티를 좋아한다. 청소년 시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너무 많아 어머니가 자동차에 실어 반납하곤 했다. 큰 체인서점에서 7년간 일하다가 트론스모로 와서 20년째 일하고 있다.


2013년 트론스모는 오슬로 시가 수여하는 ‘올해의 예술가’상을 받았다. 2014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그동안 쌓인 자료들로 기획한 것이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 선정되어 그라필상을 수상했다.


올해는 문학인과 언론인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황금상’ 가운데 최고상인 ‘황금달걀상(Gullegget)’을 에바와 그의 남편 테리에 토르센이 함께 수상했다. 서점과 서점인의 역할과 가치가 이렇게 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유명작가뿐 아니라 이름 없는 신진작가에게도 비중을 두어 다양한 행사를 여는 트론스모서점. 책 팔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베스트셀러 서점이 아니다. 독자들이 필요한 책을 편안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난리를 치는 상업적인 서점이 아니기에 사실은 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는다. 오슬로 시민들이 여유롭게 사유하는 주제적 공간이자 노르웨이의 문화적 품격을 반듯하게 지켜나가는 트론스모서점. 우리는 이런 서점을 명문 서점이라고 부른다.


김언호한길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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