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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 한국사 교과서, 언제까지 작자 미상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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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노진호
노진호 기자 중앙일보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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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호
사회부문 기자

“한국사 국정교과서 집필진이 정해졌습니다.” 지난 20일 오후 3시 전교조의 ‘국정교과서 반대’ 연가투쟁 현장에 있던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소린가 무대 앞쪽에 귀를 기울였다. 무대에 선 전교조 관계자는 “작자는 ‘미상(未詳)’입니다”고 했다. 국정교과서에 대한 조롱이었다. “집필진도 비공개하고, 공모 지원자도 비공개하고, 이제 교과서만 비공개하면 되겠습니다.” 2017년부터 학생 52만여 명(현재 중2)이 배우게 될 한국사 국정교과서가 이렇게 길거리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내내 씁쓸했다. 현재까지 집필진 중 공개된 사람은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뿐이다. 국사편찬위원회(국편)는 23일 보도자료를 냈는데 여기에도 “47명의 집필진을 최종 선정했다”고만 돼 있다.

 국편이 이런 결정을 하기까지 한 달여 동안 숱한 고민을 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국편 측은 “지금 상황에서 (집필진을) 공개하면 집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일부 시민사회단체가 특정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 앞에 떼로 몰려가 물리력을 행사하고(교학사 사태) 국정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수구’ ‘친일파’라는 오명을 덧씌우고 있는 상황에서 집필진 중 어느 누가 자기 이름이 공개되길 바랄 수 있을까. 집필진 후보군에 속한 것으로 알려진 한 명예교수는 “나는 이미 인터넷에서 수구 ‘꼴통’이 됐다”고 말했다. 집필진 실명을 공개할 수 없는 것은 교과서를 놓고 진영이 갈려 다투는 한국적인 독특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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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아무리 감안하더라도 그간 교육부와 국편이 했던 약속이 공염불에 그쳐선 안 된다. 김정배 국편 위원장은 지난달 12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확정 발표하며 “국민이 ‘아, 이러한 분이 이러한 절차에 따라 집필에 참여하시게 됐구나’ 알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했으며, 3일 황우여 교육부 장관도 “전 과정을 투명하게 운영해 ‘국민이 만든 교과서’란 이름을 듣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3일 국편은 “검정 역사 교과서도 심의를 통과한 뒤에야 집필진을 공개했다”고 했지만 집필 경험이 있는 한 교사는 “그것은 심의 과정에서 집필자에 따라 심의 통과 여부가 결정되는 부정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지적했다.

 국편이나 교육부 모두 좀 더 당당해졌으면 한다. 집필진이 ‘역적’으로 몰리는 특수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교과서가 밀실에서 제작되는 건 곤란하다. 최소한 시대별 대표 집필자만이라도 공개해야 맞다. 필자에 대한 ‘테러성’ 인신 공격이 가해진다면 그 또한 ‘야만’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드러내자. 이를 통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자유는 보장돼선 안 된다’는 점을 교훈으로 삼게 하자.

노진호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