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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인사이트

소프트 타깃 테러에 무방비인 대한민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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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Frederic Faraut 트위터 캡처]


테러 목표 소프트 타깃으로 옮겨가

이번 11·13 파리 테러의 목표물은 정부기관이나 공공기관이 아니었습니다. 록밴드가 공연 중이던 극장, 8만 명의 관중이 들어찬 축구 경기장, 일반인들이 모인 평범한 식당이었습니다. 불특정 민간인을 대상으로 이뤄진 이른바 ‘소프트 타깃(Soft Target)’ 테러인 셈입니다. 특히 ‘스타드 드 프랑스’ 축구 경기장은 테러범을 검색하다 폭탄 조끼를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경기장에 진입했다면 수천 명이 살상당할 뻔했습니다. 당시 축구장에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관람을 하고 있어 검문검색이 강화돼 참사를 피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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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ucie Bacon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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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5일 호수 시드니의 한 카페에서 소수파 이슬람주의자가 주도한 인질극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 abc 뉴스 화면 캡처]


한국 다중시설 테러 대비 허술

지난 2001년 미국 9·11테러 이후 소프트 타깃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특정 다수를 목표로 삼은 테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모이는 시설의 안전시스템은 허술하기 짝이 없지요. 대부분의 경기장은 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누구나 쉽게 통과할 수 있습니다. 프로농구가 열리는 한 경기장의 경우 보안요원이 아르바이트생 포함해 28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반면 9·11 테러를 경험한 미국은 철저한 경기장 안전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장은 국제공항 보안 검색대 수준입니다. 작은 가방까지도 철저히 검사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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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3일 프로농구 LG-인삼공사전이 열린 화성종합경기타운. 관중들이 소지품 검사 없이 티켓만 보여주고 입장하고 있다. [사진 KBL 제공]

철도·지하철 역사의 경비인력도 초라한 수준입니다. 테러는커녕 방화 등 안전사고에 거의 무방비 상태입니다. KTX, 경의선, 공항철도 등이 집결한 서울역을 지키는 경비인력은 외주인력 6명을 포함해 모두 24명 뿐입니다. 3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서울역 대합실에 근무하는 철도경찰은 평소 2명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에서 봤듯이 한 사람의 범행이 엄청난 인명피해를 낼 수 있습니다. 세계 최고수준의 치안을 자랑하는 일본도 1995년 오움진리교의 독가스(사린) 테러를 막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체계적인 시스템도, 제대로 된 장비·인력도 없는 한국에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테러가 발생한다면 우왕좌왕하다 당할 게 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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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된 지침, 대테러 컨트롤타워도 없어

우리나라 국가대테러지침에는 테러의 성격에 따라 사건대책본부를 두게 돼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방사능테러, 보건복지부 장관은 생물테러, 환경부 장관은 화학테러에 대한 사건대책본부를 설치·운영하는 식입니다. 만약 지하철역에서 화학가스 테러가 발생하면 환경부장관이 대테러 지휘를 맡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공무원들도 제대로 모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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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미국 9·11테러 이후 테러 방지를 위한 국제 협약 가입과 법령 제정 등을 각국에 권고해왔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대테러 활동을 하는데 기본이 되는 법적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9·11테러 이후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헌법상 권리를 일부 침해하는 내용까지 포함돼 있었지만 의회는 불과 2주 만에 심의를 끝낸 뒤 법안을 승인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이 협력해 이렇게 강력한 대비를 했는데도 이번에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당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새누리당 송영근·이병석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두 건의 테러 방지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그러나 국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야권이 인권 침해, 국정원의 권력남용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줄곧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 직후 테러방지법을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반짝 제기됐지만 그 뒤 별 진전이 없는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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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테러 후 프랑스의 테러 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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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정부는 2001년 헌법상 권리를 일부 침해하는 내용의 ‘일상 안전에 관한 법’ 수정안을 제안했습니다. 프랑스 의회는 불과 2주 만에 심의를 마치고 수정안을 승인했습니다. 이 법은 도버해협 터널 철도 승객들에 대한 엄격한 통제와 보안검사, 스타디움·쇼핑몰·공공장소 등에 대한 제한된 형태의 수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물론 민간 보안요원과 철도청 보안요원도 수사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임무를 수행하는데 총기 휴대도 가능합니다. 또 검찰은 테러리스트 혐의자의 은행 계좌를 모니터할 수 있고, 세무서 뿐 아니라 민간은행도 필요한 자료를 제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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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준으론 아마추어 테러도 못 막아

민간인 대상의 테러는 국가 전체를 쉽게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이는 테러범이 기대하는 효과입니다. 최근엔 테러집단이 아니라 은둔형 소외집단인 이른바 ‘외로운 늑대’에 의한 테러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다중이용 시설에 대한 안전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평소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개인이나 소수가 감행하는 아마추어 수준의 테러조차 막기 어렵습니다. 테러를 예방하는 정보활동부터 발생 시 즉각 제압하는 능력까지, 우리의 대테러 시스템 전반을 점검한 뒤 국제 테러의 변화에 걸맞게 대폭 보강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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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 Another

테러방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논리는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테러 용의자의 인권 침해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에 하나 테러가 발생할 경우 희생될 무고한 시민의 생명권입니다. 더구나 테러의 목표가 소프트 타깃으로 이동하면서 민간인의 피해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전쟁 때도 민간인을 상대로 공격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어떤 가치보다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것, 극우부터 극좌까지 있는 프랑스 의회가 올랭드 대통령의 '다에시'(IS)와의 전쟁 선포에 한 목소리로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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