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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안전을 위해 불편할 준비가 됐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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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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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쉽사리 열 받곤 한다. 다혈질이랄 수 있다. 그와 관련한 남세스러운 일화다.

 올 유럽의 한 공항에서의 일이다. 탑승 수속 중 비행기가 1시간 지연 출발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저가항공사를 이용하는 비용이라고 여겼다. 막상 출발했어야 할 시각에 운항이 취소됐다는 안내가 떴다. 탑승장을 빠져나오느라 짐을 찾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다. 마침내 담당 직원을 만난 건 그로부터 또 1시간 후인 밤 10시였다.

 뚜껑은 열릴 대로 열려 우주로 날아간 상태였다. “가장 먼저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겠다”고 요구했더니 직원이 심드렁하게 “자리가 없다”고 했다. 목소리가 올라갔다. 동료 ‘피해자’들이 힐끔힐끔 보더니 슬금슬금 피했다. 성내는 건 나뿐이었다.

 다음날 오후 대체 항공편은 나와 똑같이 황당한 일을 겪은 승객들이 탔다. 뭔가 달라야 했다. 요즘 말로 “전체를 보면 오는 기운”이란 게 있어야 했다. 없었다. 승객들은 연신 “고맙다”고 했다. 나는 내내 뚱했다. 그네들에 비하면 나는 분노조절장애 환자였다.

 이성적으로 보면 불편했지만 분노할 일까진 아니었다. 운항할 조건이 아니라면 안 하는 게 안전했다. 항공사로서도 손해를 감수하고 내린 결정일 터였다. 곧바로 대체 항공편을 띄우면 좋았겠지만 저가항공사에 기대할 일은 아니었다. 직원들이 해당 항공사 소속도, 설령 그러한들 취소 결정을 한 이들도 아니었다. 추후 항공사에 불편에 대한 보상만 요구하면 됐다. 그럼에도 나는 화를 냈다.

 근래 이집트 샤름엘셰이크에 2만여 명의 영국인이 발이 묶였다. 러시아 여객기 추락 후 나흘 만에 영국 정부가 출발지였던 이곳으로의 운항을 전면 중단해서다. 처음엔 별 설명 없이 안전 때문이라고 했다. 점차 폭탄테러로 굳어져 갔다. 마침내 사흘 만에 특별기라고 떴는데 당초 20편이라더니 막상 운항한 건 8편뿐이었다. 부치는 짐은 싣지도 못했다. 현장은 혼선·혼란·공포로 아수라장이었을 게다. 수많은 ‘나’가 있을 수 있었다.

 막상 영국에 도착해 BBC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차분했다. “캐머런 총리가 안전을 위해 옳은 결정을 했다. 다만 현지 영사 서비스는 미흡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예방한 사고는 사고가 아니다. 안전 조치의 성과는 체감할 수도 없다. 오히려 현실에선 ‘안전 조치=불편 조치’로만 느껴진다. 그럼에도 그걸 감수하고 이해해줘야 결정권자들이 주저 없이 안전을 최우선할 수 있다. 다혈질인 나는 그럴 수 있는가, 자신 없었다. 여러분들은 어떠신가.

고정애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