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한·미 정상회담 이후 '남중국해 발언' 강해진 외교안보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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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외교·안보 수장들의 남중국해 관련 입장 공개 표명이 잇따르고 있다. 내용 자체는 기존 정부 입장 그대로이지만, 발언의 형식이 전보다 더 적극적이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 5일(현지시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외교장관회의 리트리트(자유토론) 세션 발언에서 “남중국해는 세계의 주요 해상교통로의 하나로서, 한국에게는 수입 에너지의 90%와 전체 교역량의 30%가 통과하는 중요한 해역”이라며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공공재로서 동 해역에서의 항행과 상공(上空) 비행의 자유가 보호되고 존중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또 “이런 맥락에서 우리 정부는 국제적으로 확립된 행동 규범과 양자·다자 차원의 관련 공약 및 합의에 따라 분쟁이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점을 계속 강조해왔다”고 했다. ‘항행과 상공비행의 자유’는 미국이 특히 강조하는 내용이다. 왕차오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지켜보는 앞에서 한 발언이다.

지난 4일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3차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ADMM-Plus)’에선 한민구 국방장관이 남중국해와 관련된 입장을 밝혔다. 기조연설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남중국해 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항행·상공 비행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 창완취안(常萬全) 중국 국방부장도 참석한 회의에선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에 대한 공동성명 채택이 중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윤 장관과 한 장관의 발언 내용은 그 간 정부가 유지해온 입장이다. 미·중 사이 파워게임 이슈인 남중국해 문제에서 섣불리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고, 국제 규범에 기반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원론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이를 표명하는 정부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변하는 기류다.

사실 중국은 다자회의 무대에서 남중국해 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한다고 한다. 이는 당사자인 중국과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ASEAN) 국가들 사이에 풀어야지 제3자가 나설 일은 아니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국제 무대에서 이를 공론화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윤 장관은 지난 8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회의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입장 표명을 했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도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당시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됐고, 회의가 끝난 뒤에도 장관들의 발언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외교가 소식통은 “한 장관과 윤 장관이 다자회의에서 미국이 강조해온 ‘항행·상공 비행의 자유’를 지지하는 공개발언을 한 것 자체가 상징적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기류 변화에는 지난달 16일 열린 한·미정상회담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공동기자회견에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중국이 국제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한국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미국이 사실상 남중국해 문제와 관련해 한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압박을 한 것이 아니냐는 언론의 지적이 이어졌다. 정부는 그제서야 “윤 장관이 8월 EAS 외교장관회의에서 남중국해에서 항행 및 상공비행의 자유보장, 분쟁을 고조시킬 수 있는 행위 자제 필요성을 강조했으며, 미국이 이를 평가했다”고 해명했다.

지난 2일 한·일 정상회담에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남중국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 사실도 일본 측이 먼저 발표한 뒤에야 청와대가 “논의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식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한국이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계속 되자 정부 내에서도 보다 적극적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우리는 항상 국제 규범을 강조하고 당사자들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하는 일관된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를 보다 명확히 보여줘서 불필요한 오해를 막자는 것이 우리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외교부는 8월 EAS 외교장관 회의 때와 달리 ASEM 회의에서 윤 장관 발언은 즉시 자료를 배포하고 출입기자단에게 알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는 주요20국(G20)정상회의(15~16일 터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18~19일 필리핀), 동아시아정상회의(EAS·21일 말레이시아) 등 곧 열릴 연쇄 다자회의에서도 남중국해 문제가 주요 이슈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

국립외교원 김한권 교수는 “한국이 명확하게는 아니지만 미국 편에 서는 뉘앙스를 보이고 있다. 현재 우리 정부의 입장이 국제법 질서와 가치에 어긋나는 것이 전혀 아닌 만큼 원칙적·원론적 입장 밝히는 전략이 가장 유효하다”며 “명확하게 한쪽 편을 드는 모습을 보여 스스로 족쇄를 채울 필요는 없다”고 조언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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