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 증인 에드워드 리 "패터슨이 찌르는 것 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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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살인사건 주범으로 기소된 아서 패터슨이 지난 9월 한국으로 송환됐을 당시의 모습. [중앙포토]

“나는 아서가 피해자를 칼로 찌르는 것을 봤다(I saw Arthur stab the victim).”

주범 → 증인 입장 바뀌어 재회
법정서 살인 당시 상황 재연
패터슨은 “리가 찔렀다” 부인
수의 입고 정반대 상황 보여줘

 1997년 일어난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의 ‘주범’에서 ‘증인’으로 신분이 바뀐 에드워드 리(36)가 18년 만에 법정에 나와 이같이 증언했다. 남색 정장 차림의 리는 법대 앞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다.

 4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서 이 법원 형사27부(부장 심규홍) 심리로 아서 존 패터슨(36)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서 검사 두 명이 각각 피해자인 조중필(당시 22세)씨와 범인 역할을 할 때 리는 손가락으로 범인 쪽을 가리키며 칼로 찌른 건 “패터슨”이라고 지목했다. 이어 “사건 당시 나는 그저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갔고 거울을 통해 패터슨이 대변기 칸을 살펴보고는 갑자기 조씨를 찌르기 시작하는 걸 봤다”고 말했다. 또 “나는 너무 놀라 돌아섰고 조씨가 오른쪽 팔을 휘저으면서 패터슨을 때리려 했지만 패터슨은 계속해 피해자를 찔렀다”며 “조씨가 자신의 목을 붙잡고 넘어지려는 모습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왔다”고 했다.

 리는 당시 조씨가 무릎을 굽힌 채 소변을 보는 모습과 칼에 찔린 직후 손으로 목을 감싸고 비틀거리는 모습도 재연했다. 이어 하늘색 수의를 입은 패터슨이 법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칼로 찌른 건 에드워드”라며 정반대 상황을 재연했다. 둘은 피해자 조씨가 칼에 찔리자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섰다”는 대목에서만 진술이 일치했다.

 동갑내기 친구였던 두 사람은 조씨가 살해된 1997년 4월 3일 오후 9시50분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에 함께 있었다. 검찰이 처음에 주범으로 지목해 기소한 건 리였다. 당시 1·2심 재판에선 패터슨이 증인이었다. 하지만 리는 98년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 판결을 받은 데 이어 파기환송심에서 무죄가 확정돼 풀려났다.

 이날 패터슨은 리가 법정에 들어서자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둘 다 굳은 표정이었다. 미국계 한국인인 리와 패터슨은 재판에서 영어로 진술했고 통역이 이를 한국말로 옮겼다.

 리는 ‘화장실에 가기 전 패터슨에게 접이식 칼을 건네며 범행을 부추기지 않았느냐’는 검찰 질문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패터슨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변호인 측이 “경찰·검찰 수사 때 증인은 패터슨의 칼을 만졌다고 진술했다”고 추궁하자 리는 “나는 칼에 손을 댄 적이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다.

 리가 답변하는 동안 패터슨은 종이에 뭔가 적기도 했다. 변호인 측 증인심문 때 패터슨은 사건 당일 햄버거 가게에 동석했던 친구 제이슨의 진술을 놓고 리에게 직접 질문하며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패터슨은 “제이슨이 당시 수사에서 ‘누군가 화장실에 가서 뭔가 보여주겠다는 취지의 말을 하는 걸 들었다’고 진술했는데 그건 네가 범인이라는 의미”라고 리를 다그쳤다. 이에 대해 리는 “나중에 제이슨한테 들으니 당시 패터슨의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패터슨은 “리가 마약을 보여주는 줄 알고 화장실에 따라갔는데 리가 피해자를 칼로 찔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2시부터 8시간 동안 이어진 증인심문을 지켜본 조씨의 어머니 이복수(73)씨는 “둘이 서로 안 죽였다고 하는 걸 듣다 보니 18년 전 재판과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번엔 제발 범인을 밝혀 아들과 가족의 한을 풀어 달라”고 말했다.

백민정 기자 baek.mi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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