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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청와대, 집무실 재배치 예산 왜 뿌리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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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주요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대통령과 보좌진의 업무공간이 멀리 떨어져 있다. 거리가 500m나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구중궁궐 같은 본관에서 부속실장 1명만 두고 있다. 비서실장·국가안보실장과 수석비서관들은 대통령을 만나려면 비서실 건물에서 나와 차를 타야 한다. 일반 비서관은 1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유사시 북한의 미사일이 먼저 도착할 판이다.

 대통령과 주요 참모들을 한 곳에 모으는 ‘집무실 재배치’는 역대 정권의 중요 숙제였다. 김영삼·김대중·문재인 대통령후보는 재배치를 공약했다. 이명박 정권은 후반부에 설계 착수를 추진했으나 예산 확보에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결국 역대 대통령들은 이 문제를 후임자에게 떠넘기는 모양새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를 담당하는 국회 운영위가 내년도 예산에 설계용역비를 반영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청와대가 거절한 것으로 밝혀졌다. 청와대가 적극적으로 국회를 설득해도 모자랄 판에 국회가 주겠다는 예산을 청와대가 뿌리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평소 지금의 구조로도 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보여 왔다. 그런 판에 국회가 주는 예산을 받으면 청와대가 소통의 문제를 인정한 모양새가 되는 걸 청와대는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소통에 문제가 없다는 대통령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미국 백악관이나 영국·독일·일본 등의 집무실은 대통령·총리와 핵심 보좌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런 밀집형 구조여야 평소에 국가 수뇌부가 활발한 소통상태에 있게 된다. 평소도 평소지만 특히 위기 발생 시 집무실 구조는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대면(對面) 보고의 속도와 내용, 민심파악 등에서 분리형은 매우 불리하다.

 참모들이 빠르고 자유롭게 대통령 방을 드나들었다면 청와대의 ‘초기 메르스 방황’은 없었을 것이다. 지뢰도발 사건 때도 초기에 박 대통령은 안보관계장관 회의를 주재하지 않는 등 대처에 허점을 보였다. 이것도 역시 ‘공간의 실패’에 해당한다. 참모로부터 전화나 e메일보다 직접 설명을 듣는다면 대통령은 보다 효율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한국과 같은 분단 대치 국가에서는 이런 소통의 물리적 조건이 더욱 중요하다.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참모들이라도 자주 직접 만나야 한다. 그러려면 대통령과 참모들의 공간이 바싹 붙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세종시가 보여주는 분리 공간의 심각한 비효율을 생생히 목격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 문제만큼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재배치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정권을 넘어 국가, 자신을 넘어 후임 대통령들의 문제다. 재배치 같은 일이야말로 역사에 남는 과업이다. 청와대는 체면은 제쳐두고 국회가 주는 예산을 받아야 한다. 대통령 집무실을 개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