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노트] 가장 뼈아픈 순간 가장 빛났던 류중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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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한국시리즈(KS) 5차전이 끝난 서울 잠실구장. 류중일(52) 삼성 라이온즈 감독은 선수들을 이끌고 그라운드로 걸어나왔다. 그는 우승 메달을 받는 두산 베어스 선수단을 향해 박수를 쳤다. 서로 눈치를 보던 삼성 선수들도 손뼉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2015년 삼성의 야구는 그렇게 끝났다. 1승 뒤 4연패. 류 감독에겐 올 시즌 가장 뼈아픈 순간이었겠지만 그는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수천 명의 삼성 팬들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는 삼성 선수단을 향한 응원이었다. 류 감독은 "2011년 아시아시리즈에서 우리가 우승했을 때 결승전 상대였던 소프트뱅크 호크스(일본) 선수들이 더그아웃 앞에 도열해 박수를 쳐 주더라. 내가 준우승을 하게 된다면 꼭 그렇게 우승 팀을 축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독으로서 가장 비참한 순간이 눈앞에서 우승을 놓쳤을 때다. 1년 내내 잘 하다가 몇 경기 때문에 패배자가 된 것 같은 억울함, 우승팀의 들러리가 되는 듯한 열패감에 빠지기 쉽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9번이나 KS 우승을 맛봤던 김응용(74) 감독은 삼성을 맡았던 2001년 처음 KS에서 패하자 공식 인터뷰도 하지 않고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소프트뱅크도 이벤트 대회인 아시아시리즈가 아니라 일본시리즈에서 준우승에 그쳤다면 우승 팀을 축하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래서 박수 치는 삼성은 박수 받을 만 했다.

삼성은 지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4년 연속 통합우승(정규시즌+KS)을 이뤄냈다. 올해도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한 그들은 해태의 4년 연속(1986~89년) KS 우승 기록을 넘어서는 순간만 기다렸다. 그러나 KS 직전 터진 불법 도박 파문으로 삼성은 크게 흔들렸다. 사후 대처마저 늦어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삼성은 주축 투수 3명을 엔트리에서 과감하게 제외했다. 유감을 표명하고, 엄격하게 사후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예상보다 강한 조치를 내렸다. 삼성의 경기력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니퍼트와 장원준의 역투, 양의지·정수빈의 부상투혼이 더해져 두산이 이겼을 뿐이다. 삼성은 두산의 우승을 축하하면서 패배자가 아닌 준우승팀이 됐다.
KS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정규시즌 2위 NC 다이노스의 가을야구도 아름다웠다. 시즌에 앞서 실시한 전문가 예상에서 4강 후보에 들지 못했던 NC는 정규시즌 끝까지 삼성을 위협했다. 에릭 테임즈가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40홈런-40도루를 돌파했고, 주전 야수 9명 전원이 규정타석(446타석)을 채운 것도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NC와 두산이 치른 플레이오프(PO) 5경기 모두 명승부였다.

제9구단 NC는 올해로 1군 리그 진입 3년째를 맞았다. 외국인 선수 보유한도가 4명에서 3명으로 줄어드는 등 신생팀 프리미엄을 더 이상 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NC는 신흥 명문팀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뛰어난 성과를 냈고, 합리적으로 구단을 운영했다. 김경문(57) NC 감독은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간판타자 나성범(26)을 PO 5차전 마지막 투수로 내보냈다. 나성범은 올 시즌 팀의 마지막 아웃카운트(오재원 3루 땅볼)를 잡아내며 창원 홈 팬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가을야구의 유래는 1903년 미국의 양대 리그 우승팀(피츠버그-보스턴) 간의 첫 월드시리즈(WS)였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작됐으나 수많은 명승부와 스토리가 축적되면서 WS는 가을의 고전(fall classic)으로 불리고 있다. 단기전을 좋아하고 승자독식 구조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특성 때문에 우리의 가을야구는 항상 과열됐다. 격한 몸싸움, 사인훔치기 논란, 판정 불복 등으로 명승부가 얼룩지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가을야구는 좀 달랐다. 우승팀 말고도 기억할 게 많은, 고전 같은 시리즈로 남았다.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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