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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김대중-오부치 '최고의 정상 궁합', 노무현의 '역사 훈계'에 고이즈미 당황

중앙일보

입력

한·일 정상회담에서 가장 큰 이슈는 과거사 문제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 문제가 가장 중요한 핵심 현안으로 꼽힌다. 따라서 역사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가 곧 정상회담의 성패와도 직결된다.

가장 모범적으로 푼 예는 1998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일본 총리의 회담으로 꼽힌다. 당시 발표한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식민 지배로 인해 한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한다”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 하에서…국제사회의 평화·번영을 위해 수행해온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고 화답했다. 일본이 반성과 사죄를 공식 문서로 남긴 것도, 패전 이후 일본의 긍정적 노력을 한국이 평가해준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는 짧은 황금기였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때는 일본발 악재가 이어졌다. 다케시마의 날 지정, 교과서에 독도 영유권 주장 표기, 고이즈미 총리의 잇따른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 등이었다. 노 대통령은 대국민담화까지 발표하며 강경대응으로 맞섰다. 개성이 강한 두 정상이 역사 문제로 정면충돌하는 양상이 이어졌다.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5년 6월 고이즈미 총리가 방한해 정상회담을 했을 때도 분위기는 냉랭했다. 노 대통령 스스로 회담 결과를 설명하며 “2시간 중 1시간 50분을 역사문제에 할애했으나, 합의에 이른 것은 없다”고 했을 정도다. 당시 관여했던 한 당국자는 “노 대통령이 역사적 사실들을 거의 훈계조로 쏘아붙이듯 쉴새없이 쏟아내 동시통역이 버거워할 정도였다. 특히 일본 외무성은 한국이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역사 문제를 제기할 것이란 예상을 하지 못했고, 이런 보고를 받고 왔던 고이즈미 총리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전했다.

이명박 대통령 때도 한·일 정상이 역사 문제로 충돌했다. 2011년 12월18일 일본 교토였다. 불과 석달 전 헌법재판소에서 한국 정부가 위안부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권 확보를 위해 일본 정부에 적극적 조치를 취해야 한단 취지의 결정을 내린 터였다. 이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측이 결단하라”고 촉구했으나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는 “이미 법적으로 해결된 문제”라며 되레 “평화비 소녀상을 철거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대통령은 “일본이 성의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제2, 제3의 소녀상이 세워질 것”이라고 응수했고, 썰렁한 분위기 속에 회담이 끝났다. 외교가 소식통은 “당시 정상회담 날짜가 이 대통령의 생일이자 대통령 당선일(12월19일) 하루 전날이라 일본 측에서는 깜짝 선물로 막걸리와 맥주를 섞은 칵테일 ‘MB주’를 준비했다. 하지만 정상회담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서 결국 이건 내놓을 생각도 못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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