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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묻고 리버크네히트 전 독일 튀링겐 주 총리 답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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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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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크네히트 전 독일 튀링겐 주 총리가 김영희 대기자에게 동독 시절의 체험, 통일의 과정, 통일된 독일의 동서 통합 현황을 정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통일 뒤 동서 간 내적인 장벽이 있었으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극복했다고 소개했다. [신인섭 기자]

김영희=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통독은 유럽 모든 국가들이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

 리버크네히트=당시 동베를린에서 제가 속해 있던 동독 기독교민주당의 당 대표 선출 회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니 사람들이 모여 귓속말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저는 가족들과의 약속 때문에 곧바로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어요.

 김=당시 베를린 장벽이 열린 직접적인 원인은 정부 대변인의 말실수 때문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 통일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의해 우연히 이뤄진 일입니까.

 리버크네히트=독일 통일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사전에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8월 말 이미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됐고, 소련 공산당 제1서기 고르바초프의 개혁(페레스트로이카)도 독일 통일의 촉진제였어요. 가장 중요했던 건 소련이 동독 정권을 더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겁니다.

 김=베를린 장벽 붕괴를 보고 독일, 유럽, 세계 역사의 새로운 장(章)이 열린다는 걸 실감했습니까.

 리버크네히트=장벽이 무너져 수많은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모두들 ‘우리는 한 국민’이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통일이 된 만큼 독일인들은 장벽 붕괴의 그날을 다른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 명확하게 기억합니다. 통일이 된 뒤에도 많은 독일인은 옛 베를린 장벽 근처로 가서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곤 합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독일 근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인상 깊은 사건입니다.

 김=한국에 89년의 독일같이 통일이 시야에 들어오면 북한의 군부와 당 간부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거세게 저항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핵과 미사일을 갖고 있는 것이 독일의 경우와 다릅니다. 그때 동독의 파워 엘리트들, 특히 당·군의 고위층과 슈타지(Stasi·국가보안부) 간부들의 저항은 전혀 없었습니까.

 리버크네히트=소련이 동독 정권에 의한 시민혁명 탄압을 지지하지 않았어요. 고르바초프는 ‘늦게 오는 자는 인생의 벌을 받는다’는 속담을 인용해 동독의 개혁을 촉구했고 공산당 내에서도 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라이프치히에서 수십만 명이 평화 시위에 참여하고 유명 인사들이 정부에 대해 평화를 요구했기 때문에 동독 지배층은 저항하지 못하고 통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통일 후 동독 군대를 해체해 통일 독일의 군대에 편입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실제로 동독의 많은 고위 장성의 계급이 강등되기도 하고 일부는 군복을 벗고 전역하기도 했습니다. 동독 군인들을 통일 독일 군대로 편입시키는 데 어떤 기준이 적용됐습니까.

 리버크네히트=군인들뿐 아니라 경찰이나 교육기관 등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재등용을 위한 심사위원회의 심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위원회는 옛 동독 체제에서 개인적으로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또 슈타지 활동에 얼마나 가담했는지 등의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큰 잘못에 가담했음에도 그걸 증명할 수 없어 운 좋게 통일된 독일에서 계속 활동을 하거나 새 직장을 얻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척 복잡한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로 아직까지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김=당시 동독에서는 수많은 주민들이 촛불을 들고 “우리가 국민이다” “우리는 하나의 국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체제가 바뀌면 기득권을 잃게 되는 데 위협을 느껴 이 시위에 반대하는 동독인들은 없었습니까.

 리버크네히트=라이프치히에서 수십 만 명이, 베를린에서는 100만 명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어요. 동독인 모두가 참가한 건 아니지만 그때까지 열렸던 어떤 시위보다 규모가 컸고 메시지도 명확했습니다. 대다수 동독 주민들이 독일 통일을 원했다는 것은 90년 3월 첫 자유총선에 주민의 3분의 2 이상이 투표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김=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지난해 3월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 “독일 통일은 행운(Glcksfall)”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리버크네히트=독일 통일을 행운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통일에 필요한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국내외적인 정치 상황이 통일이 가능하도록 진행되었고 평화와 자유를 외치는 용기 있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거기다 서독 정부는 그때의 상황에 맞는 훌륭한 정치를 펼쳐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한꺼번에 일어났기 때문에 독일은 통일이 됐고, 그건 큰 행운이라 할 만합니다.

 김=행운을 너무 강조하면 동독·폴란드·헝가리·체코의 시민혁명과 고르바초프의 신사외교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 아닙니까.

 리버크네히트=물론 각국의 시민혁명과 외교적 노력도 중요했지만 통일에 필요한 많은 사건이 적시에 일어난 것은 분명한 행운입니다. 만일 시위 과정에서 단 한 명이라도 사살을 당하거나 일이 틀어졌다면 통일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행운은 독일 근현대사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례적인 일입니다.

 김=“모든 관련자들은 독일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법적 명확성(Rechtssicherheit)에 직면했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뜻입니까.

 리버크네히트=그 표현의 설명을 위해서는 “영원한 평화는 조약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이마누엘 칸트를 인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 평화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서로 간에 신뢰할 수 있는 조약이나 공정한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통일된 독일에서는 다른 국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동독 주민들의 재산이나 연금 등 개인의 권리를 지켜주는 일도 아주 중요했습니다. 법적 명확성에 직면했다는 것은 통일 이후에도 통일조약에 명시된 약속들을 명확히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는 의미입니다.

 김=통일 25주년을 맞은 오늘, 옛 동독인들이 갖고 있던 오스탈기(Ostalgie·동독에 대한 향수)와 같은 현상들은 사라졌다고 할 만큼 사회적인 통일이 이뤄졌습니까.

 리버크네히트=저는 오스탈기나 베서-베시(Besser-wessi·거만한 서독인), 야머오시(Jammer-ossie·죽을 지경이라고 불평만 하는 동독인) 같은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런 표현들은 잘못된 가르침이나 편견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독일 통일은 서독의 엘리트층에 의해 서둘러 진행됐고, 그래서 장벽 붕괴 후에도 동서독인들의 의식 속에는 여전히 내적인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공동회사 설립이나 공동학문 연구 등 동독과 서독 간 교류 활동을 통해 내적인 장벽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김=메르켈 총리가 세 번 연임에 성공하며 장기 집권하고 있습니다. 보수정권의 장기 집권, 사회민주주의 퇴조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리버크네히트=독일 통일 당시 기민당은 국민과 같은 편이라는 입장을 확실히 했어요. 시민들이 통일 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당을 원했기 때문에 기민당을 선택했습니다. 통일 후 한때 사민당이 집권한 시기가 있었지만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이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좋은 정책을 펴서 국민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장기 집권이 가능한 것입니다.

 김=유럽 전체를 봐도 지금 우파가 뜨고 ‘좌파가 지는 현상입니다. 독일 사민당도 이런 ‘좌파의 위기’에 휩쓸린 건 아닙니까.

 리버크네히트=정치인에게 중요한 문제는 현 시대에 필요한 정책이 무엇인가 고민하는 겁니다. 좌파는 항상 개인보다는 국가와 집단을 우선순위로 하고 있습니다. 반면 기민당은 개인의 자유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연대감도 강조합니다. 기민당의 이런 정치적 성향이 현 시대에 더 적절하기 때문에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김=지난달 22일 역사학자 그레고르 숄겐이 쓴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전기 출판 기념행사에 메르켈 총리가 깜짝 등장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메르켈 총리는 사민당 소속 슈뢰더 전 총리의 ‘어젠다 2010’ 경제·복지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이 성공한 것이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설고 부러운 광경입니다. 이게 독일 정치의 보편적인 모습입니까, 메르켈 총리의 예외적인 깜짝쇼였습니까.

 리버크네히트=독일 정치의 특징은 연정입니다. 정치를 하는 과정에서는 당연히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중요한 결정은 항상 합의를 통해 도출하는 걸 지향하고 있습니다. 하원에서는 기민당과 사민당이 지배적이지만 상원에선 기민당과 사민당 외에 녹색당을 포함한 여러 당의 합의를 통해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정치적 결정 자체가 합의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에 그 결정을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리=정진우 국제부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크리스티네 리버크네히트는 …

예나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동독에서 반(反)체제 운동을 한 경력을 인정받아 통일 이후 1990년 튀링겐 주 기민당 부대표로 선출됐다. 주 연방부장관을 거쳐(94~99년) 주 의회 의장으로 일한 바 있으며(99~2004년) 2009년부터 튀링겐 주 총리를 역임하다 지난해 자리에서 물러났다.김영희=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