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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인체조직 공급을 영리업체에 맡길 수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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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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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일
건양대 의료원장
한국인체조직기증지원본부
명예이사장

지난 9월 한 방송 보도에 따르면 인체조직 최대 수출국인 미국의 식품의약국(FDA)에서 2010년 이후 규정 위반으로 회수 조치를 내린 부적합 인체조직 중 총 210개가 국내에 유입됐다고 한다. 문제는 이 중 193개가 이미 환자에게 이식되었고, 실제 회수나 폐기가 된 것은 17개뿐이라는 것이다. 또 관리감독기관인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는 부적합 인체조직의 수입이나 유통, 이식뿐만 아니라 미국 FDA의 회수 조치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고령화와 의술의 발전, 그리고 예기치 못한 각종 사건·사고 등으로 인체조직 이식 수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연간 인체조직 기증자 수는 200여 명에 불과하다. 약 74%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바로 이 수입 인체조직의 안전 관리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타인의 생명 유지와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체 유래물에는 혈액·장기·인체조직·조혈모세포·제대혈 등이 있다. 이 중 유일하게 사후에도 기증할 수 있는 것이 뼈·연골·근막·건·인대·피부 등의 인체조직이다. 특히 인체조직은 한 사람의 기증을 통해 100여 명이 수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처럼 생명이 위태롭거나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해 무상 기증되는 인체조직은 다른 의약품이나 식품과 달리 사람의 몸에 직접 이식되므로 생명과 직결되는 치료재다. 이 때문에 치명적인 질병을 전염시킬 수 있어 안전성이 매우 중요하다. 20여 년 전에 수혈받은 환자가 에이즈에 감염된 사건이나 세상을 원망한 에이즈 환자가 일부러 에이즈를 전염시키기 위해 헌혈을 자청한 사건을 떠올리면 그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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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처럼 인체조직 이식재의 수입 의존도가 높을 경우 이식재의 안전성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경제적 부담이 문제가 된다. 이식재의 수급도 보장할 수 없다. 인체조직은 국민의 건강 보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를 수입에 의존하면 비싼 금액을 지불하면서도 적기에 구하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8월 인체조직의 최대 수출국인 미국에서 긴급 화상 환자에게 사용되는 피부 이식재를 전략 물자로 지정해 수출량을 대폭 줄였다. 게다가 영리 가공업체에서 낮은 의료수가를 이유로 생산을 줄인 탓에 재고 부족으로 많은 국내 환자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자급자족의 필요성은 더욱 크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관련법의 미비로 인체 유래물 중 유일하게 인체조직만 부가세를 부과하도록 규정돼 왔다. 인간의 존엄성을 철학의 기본으로 여긴 칸트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본질을 훼손하는 비윤리적 행위인 것이다. 다행히 2013년 일부 개정된 ‘인체조직 안전 및 관리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인체조직이 공공재로 인정됐다. 올해 4월에는 인체조직 기증 활성화를 전담할 기증지원기관으로 한국인체조직기증원이 지정됐다.

 하지만 공공성이 보장되는 비영리 인체조직은행의 설립이 법에 명시돼야 하는데 일부 이해관계자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정부의 100% 예산 지원으로 무상 기증에 의해 얻어진 인체조직이 영리 가공업체들에 공급되는 엉뚱한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인체조직 기증 선진국인 유럽에서는 모두 공공성을 띤 비영리 조직은행에서 가공된 인체조직 이식재를 공급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이식재의 공급을 영리 가공업체가 주도하는 기형적인 형태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체조직을 이식받는 수혜자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혜택이 없다. 오히려 정부의 예산 지원으로 원자재 가격이 낮아져 영리 가공업체의 수익만 증대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지난 5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은 무상 기증된 인체조직을 채취하고 가공해 이식재가 꼭 필요한 환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하는 공공조직은행의 설립을 골자로 한 일부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현재 혈액은 헌혈을 통해 무상으로 기증되고 있으며, 그 혈액은 저렴하고 안전하게 환자에게 공급된다. 법안에서 추진되는 기구가 실현되면 인체조직도 그런 시스템으로 공급될 수 있다.

 동일한 기증자의 인체 유래물인 장기와 인체조직은 이식하는 우선순위의 차이만 있을 뿐 존엄성의 차이는 없다. 장기와 마찬가지로 인체조직도 상품이 아닌 선물로 간주돼야 한다. 그리고 안전성과 품질이 보장돼야 무상 기증자의 생명나눔 정신이 지켜질 수 있다. 이런 정신을 제도적으로 구현하려면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이원화된 국내 장기와 인체조직의 구득(求得)체계를 일원화하고 공공조직은행의 설립을 통해 인체조직의 공적 관리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인체조직이 적절한 제도를 통해 환자에게 안전하고 저렴하게 공급된다면 그런 공공선의 가치를 위해 인체조직을 기증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조속한 시일 내에 법과 제도가 개선되어 무상 기증된 인체조직이 질병과 장애 등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숭고한 생명나눔의 선물로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창일 건양대 의료원장·한국인체조직기증지원본부 명예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