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4) 토왕폭과 송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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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토왕폭 빙벽 하단을 우회한 송준호와 두명의 지원 대원은 사흘 전 장비를 놓아두었던 곳에서 담배를 피우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마치고 중단의 완만한 경사 부분을 오르기 시작한 때는 낮 12시 15분쯤. 송준호는 70m짜리 자일의 한쪽 끝을 몸에 묶고 올랐으며, 한명의 대원이 자일의 다른 한쪽 끝을 30m가량 사려 배낭 위에 얹고 뒤를 따랐다.

송준호를 뒤따라 오르는 대원은 송준호와의 거리를 5~6m 정도로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체력과 기량 차이로 갈수록 간격이 벌어졌다.

치밀한 성격의 송준호는 토왕폭 빙벽 단독등반에 나서기 전에 잦은 바위골의 50m와 1백m 폭포에서 두차례 훈련등반을 가졌었다. 송준호는 1971년 1월 후배 오세진과 함께 1백m 폭포를 11시간의 사투 끝에 겨우 올랐다.

이들의 등반시간은 요즘 기준으로 보면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앞 이빨(프론트)이 없는 8발 아이젠에 길이 1m가 넘는 무거운 피켈 한자루에 의지한 채 아이스 하켄도 없이 종일 피켈을 휘두르며 스텝 커팅(빙벽에 발 디딜 계단)하면서 등반해야 하는 당시 상황으로선 결코 긴 등반시간이 아니다.

당시엔 그런 방식으로 잦은 바위골의 1백m 폭포나 토왕폭 같은 깎아지른 둣한 빙벽을 등반한다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송준호가 설악산의 1백m 폭포를 등정했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다.

이듬해인 72년 12월 중순, 설악산 잦은 바위골에서 두번째 훈련등반을 했다. 이때 송준호의 등산화에는 8발이 아닌 앞 이빨이 달린 12발 아이젠이 묶여 있었다. 새 장비를 갖춘 그는 날쌘 표범처럼 15분 만에 50m 폭포를 올랐다.

그리고 11시간의 사투를 벌였던 1백m 폭포는 불과 30분 만에 등정했다. 얼음기둥 꼭대기에서 하얀 표범은 울부짖었다.

"석주야, 이제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너를 위한 작은 케룬을 쌓고 그 위에 너의 피켈을 꽂아주마."

훈련등반을 통해 그는 토왕폭도 등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1백m 폭포 등반 중 아이젠의 밴드가 풀어지는 위기를 만났지만 빙벽 위에서 발레하듯 절묘한 균형을 잡고 밴드를 다시 고쳐 맸다는 일화는 이제 송준호라는 이름과 더불어 전해지는 신화가 되었지만….

요즘 장비라면 1백m 폭포를 30여분 만에 등정할 수 있는 산쟁이가 드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70년대 초 쓰던 긴 피켈과 아이스 대거(얼음 송곳), 그리고 모래내 금강(M.K)에서 만든 국산 아이젠으로 1백m 폭포를 오르라고 한다면 누구도 등반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송준호가 토왕폭 상단 출발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와 지원 대원과의 거리는 40여m로 벌어져 대원은 허겁지겁 손에 감고 있던 자일을 풀어줬다.

그러던 대원은 어느 순간 멈칫했다. 가파르게 턱진 빙벽이 눈 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급히 경사가 심한 골을 피해 산행 방향을 바꾸는 순간, 그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정리=김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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