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중성미자' 정체 벗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7면

올해 초 일본 쓰쿠바(築波)시의 고에너지 가속기 연구소(KEK)에서는 한동안 가동을 멈췄던, 특수입자 빔을 만드는 장치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입자 빔이 향하는 곳은 2백50㎞ 떨어진 가미오카(新岡)시의 지하 1천m 지점. 이곳에는 '수퍼 가미오칸데'라 불리는 초대형 실험시설이 있다. 이를 이용해 특수입자의 성질을 밝히는 3년간의 실험이 올 초 시작된 것이다.

성질을 밝혀낼 입자의 이름은 '중성미자'. 물질과 거의 반응하지 않고 어떤 장애물이든 쑥쑥 뚫고 다닌다.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여 한동안 중성미자도 빛처럼 질량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가 최근 들어서야 질량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나마 질량을 정확히는 모른다. "질량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극히 미미해 커 봐야 전자의 50만분의 1"이라고 하는 정도다.

막연한 정보지만 과학계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물질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과학자들이 신봉하던 '표준 모델'에 수정이 불가피하게 된 것. 표준 모델에서는 중성미자의 질량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처럼 중성미자는 성질 하나하나가 밝혀질 때마다 물리학 등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중성미자 관련 연구자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만도 1988년, 1995년, 2002년 세차례다.

지구에 쏟아지는 중성미자는 대부분 태양에서 생성된다. 태양 같은 별은 내부에서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 엄청난 빛과 에너지를 내뿜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숫자의 중성미자도 사방으로 방출한다. 지구 표면이라면, 엄지손톱만한 넓이에 초당 4백억개의 중성미자가 쏟아진다.

이렇게 많은 중성미자가 쏟아지지만 물질과 거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고 대부분 지구를 뚫고 나간다. 사람의 몸을 투과하는 것이 1초에 수십조개다.

현재 중성미자 연구 시설은 두곳.하나는 일본의 수퍼 가미오칸데와 그 관련시설이고 다른 하나는 캐나다에 있다. 캐나다의 것은 지하 약 2천m에 위치한다.

둘 다 깊은 지하에 있는 것은 중성미자 관련 실험이 극히 정밀한 관측을 필요로 해 잡신호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수퍼 가미오칸데는 특히 87년 마젤란 성운에서 거대한 별(초신성)이 폭발했을 때 나온 중성미자 12개를 잡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수퍼 가미오칸데는 거대한 원기둥 모양으로 지름 39m, 높이 42m다. 이 안에 5만t의 물을 채우고 실험을 한다. 물에 들어온 중성미자가 남긴 흔적에서 중성미자가 어떤 에너지를 갖고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지를 알아낸다.

거의 반응을 일으키지 않아 무엇이든 뚫고 다니는 중성미자지만, 1조의 1백억배쯤 되는 갯수가 쏟아지면 그중 하나는 물 원자의 전자가 퉁겨져 나가도록 한다. 이 전자는 물 속에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인다. 진공 속에서의 빛보다 느리지만, 물속에서의 빛보다는 빠르다. 이 때 전자는 파란 빛을 내는데, 바로 이 빛이 중성미자의 에너지와 방향을 알려준다.

'빛'이라지만 너무 희미해 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매우 감도가 높은 탐지기를 써야 한다. 수퍼 카미오칸데 안에는 초고감도 빛 탐지기 1만1천여개가 있다.

올해 일본에서 시작한 실험은 중성미자의 또 다른 신기한 성질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중성미자는 모두 세 종류가 있는 것을 실험에서 찾아냈고, 이론적으로도 밝혔다.

특히 과학자들은 이 세 종류가 따로따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 종류가 다른 종류로, 또 다른 종류로 계속 바뀐다. 중성미자는 대략 1초에 1백만번 정도 이렇게 종류 바꿈을 한다. 이런 성질은 중성미자가 수백㎞를 날아가게 해야 제대로 관측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은 수퍼 가미오칸데에서 2백50㎞ 떨어진 곳에서 중성미자 빔을 만들어 쏘는 것이다.

중성미자가 탈바꿈하는 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탈바꿈하는 순서 등을 정확히 알아내면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이론(표준 모델)이 크게 바뀔 수도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당연히 노벨상감이다.

그러나 탈바꿈에 관한 성질을 아주 정밀하게 알아내려면 수퍼 가미오칸데로는 불가능해 일본은 국제 공동 연구로 2008년부터 '하이퍼 가미오칸데'를 짓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 시설은 크기가 수퍼 가미오칸데의 20배다.

일본은 하이퍼 가미오칸데 프로젝트에 이미 서울대 김수봉(물리학부) 교수 등 한국 과학자들의 참여를 요청했다. 그간 중성미자 분야에서 우리 과학자들이 뛰어난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김교수는 87년 초신성 폭발 때 나온 중성미자를 찾을 때 함께 했고, 중성미자가 질량이 있음을 밝혀내는 데도 공헌했다. 최근에는 중성미자의 에너지를 극히 정밀하게 분석하는 장치를 개발해 수퍼 가미오칸데에 설치했다.

현재 수퍼 가미오칸데에서의 연구에는 김교수 외에 전남대 등의 연구팀도 참여하고 있다.

김교수는 "하이퍼 가미오칸데를 이용한 공동 연구 지원을 과학기술부에 요청했다"며 "중성미자 연구에 참여해 우주의 기본 원리를 밝히는 데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하면, 모두가 한국의 기초과학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권혁주 기자

<사진설명>
(上)1987년의 초신성 폭발 장면. 오른쪽에 밝게 빛나는 것이 초신성이다. 이때 나온 중성미자 12개를 찾아냈다.

(下)물을 채우고 있는 수퍼 가미오칸데의 내부. 벽에 붙은, 전구처럼 동그란 것이 초정밀 빛 감지 장치다. 연구진이 보트를 타고 다니며 감지 장치를 점검하고 있다.[일본 도쿄대 가미오카 연구소 제공]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