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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늘상 해오던 정찰 임무였다. 갑자기 일이 복잡해졌다. 분리주의 반군 4명이 탄 지프차가 도로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 서자 그들은 숲 속에 바짝 엎드렸다. 길은 두 가지였다. 도망치든가, 그곳에 있든가. 미카엘 스킬트(38)는 군용 나이프를 손으로 확인했다. 어둠을 기다릴 참이었다.

우크라이나전에 참전해 영웅이 된 스웨덴 저격수가 말하는 전쟁의 실상

스킬트는 평소와 다르게 긴장했다. 보통 전투 직전에 그는 모든 불필요한 생각과 감정을 없애는 ‘작업 태세’에 돌입한다. 우크라이나 동부 일로바이스크에서 반군과 마주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심장이 뛰었다. 익숙치 않은 느낌이었다.

스웨덴인 스킬트는 전투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번엔 조금 달랐다. 보통 그는 조준경 너머로 적을 본다. 적의 죽음은 그가 미처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눈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스킬트의 경험으로 보면 적은 보통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애초에 스킬트는 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저격수 양성소에서 가르치는 내용이다. 절대 적의 얼굴을 보지 마라.

밤이 찾아왔다. 움직일 때다. 반군은 같은 곳에 차를 세워두고 있었다.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우면서 보드카를 마셨다. 취했겠거니 하고 스킬트는 생각했다. 차량으로 기어갔다. 스킬트는 운전석, 친구는 조수석을 맡았다. 우크라이나편에서 싸우기 위해 아조브 부대에 입대한 스웨덴인이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창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채로 잠들어 있었다. 스킬트는 남자의 몸에 칼을 꽂았다가 뺐다. 수명이 다한 남자는 꺽꺽대며 공포로 가득찬 눈으로 스킬트를 바라봤다. 팔을 흐느적댔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그는 15초에서 20초 사이에 죽었다.

조수석에선 스킬트의 친구가 할 일을 마쳤다. 운전석 뒷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도망치려 했지만 넘어졌다. 스킬트가 덮쳤다. 그 역시 긴장해서 발을 헛디뎠지만 표적을 놓치진 않았다. 눈을 찔렀다. 칼이 부러졌다. 피비린내가 났다. 스킬트와 친구는 시체를 숲 속에 숨겼다. 다음날 아침 다른 차가 왔다. 차에서 내린 남자들은 피가 흥건한 지프차를 보고는 도망쳤다.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났다. “아직도 그 끔찍한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고 스킬트는 스웨덴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말했다. “피가 호흡기 아래에서 들끓는 소리다. 끔찍하다. 가끔은 잘 때도 그 소리와 피비린내가 느껴진다. 내 삶에서 오직 한 가지 없어지길 바라는 게 있다면 바로 그 느낌이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

아조브 부대 병영은 키에프 외곽의 버려진 산업단지에 있다. 건물 밖에선 시민 자원봉사자들과 병사들이 교실을 짓고 크로스핏 운동시설을 만드는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고철을 모아 1400명 이상의 병사들을 위한 군사훈련 시설을 세우는 중이다.

병사들이 이따금 방문을 열었다가 안에 있는 스킬트를 보고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현실은 신화처럼 흥미진진하지 않다”고 스킬트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집중 사격을 받고 있을 때면 세상 모든 총들이 나를 겨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저격수인 내가 그 총소리를 멎게 하면 나는 그들의 영웅이 된다.”

스킬트는 바싹 깎은 불그스름한 금발에 턱수염을 길렀다. 성격은 느긋하고 무던하며 말투는 사무적이다. 자기 비하적인 농담을 즐겨 한다. 대화할 때 상대의 눈을 뚫어지게 본다. 복장은 미군 전투복이며 왼쪽 가슴에 우크라이나군 저격수 배지를 달았다. 전선에서 찍었던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지금은 보다 부드러워 보인다. 키에프 시내의 아조브 부대 본부 교관이라는 보다 정적인 업무를 맡은 결과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들에 비하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다”고 스킬트는 덧붙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나는 9개월을 전선에 있었다. 다른 병사들에게 전해줄 것이 많다.”

키에프 독립광장에서 불과 수백m 떨어진 아조브 부대 본부를 걸어 보니 병사들 사이에서 스킬트의 입지가 확연히 드러났다. 전통적인 계급이나 관행을 무시하는 부대임에도 병사들은 스킬트를 마치 사령관처럼 대했다. 그가 방에 들어가면 일어났고, 복도를 걸어가면 좌우로 갈라졌다. 거의 모두가 그를 아조브식 악수로 환영했다. 손으로 상대 팔뚝을 잡고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라 읊조리는 인사법이다.

17개월 전만 해도 스킬트의 현재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스웨덴 국방군 저격수였던 그는 스웨덴 극우 세력의 일원이었으며 여러 네오나치 집단에서 대변인 역할을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감옥을 수차례 드나들며 건축업에 종사했다. 건설 노동자로 자리 잡은 지난해 2월 그는 마침내 올바른 길을 찾은 듯이 보였다. 급여가 넉넉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었고, 여자친구가 생겼으며, 스톡홀름 교외에 집도 구했다. 삶에 문제라곤 하나도 없었다.

스웨덴군에서 제대한 2009년 스킬트는 폭행죄로 체포돼 2개월 동안 수감됐다. 그때 다른 수용자를 폭행해 6주 동안 독방에 갇혀 지내기도 했다. 2011년에도 사고를 쳤다. 축구 경기장에서 술에 취한 훌리건을 때리는 사복 경찰에 맞섰다. “한 번만 더 때리면 그 몽둥이를 목구멍에 쑤셔 넣어주겠다고 말했다”고 스킬트는 돌이켰다. 그 경찰이 스킬트를 알아보지 못해 이틀만에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3개월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나는 항상 모험을 찾아 헤맸다”

전과자라 직업을 찾기가 힘들었다. 스킬트는 결국 스웨덴에서 가장 악명 높은 극우 단체의 대변인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악마의 대변인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스웨덴 경찰에 분노해 극우 단체에 이끌렸지만 결국 그곳에서도 환멸을 느꼈다. “내가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족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리석었다. 조직 내에 얼간이가 많았다.”

스킬트의 극우 단체 활동은 2004년부터 2009년의 군 복무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는 저격수였지만 한 번도 전장에 나가거나 전투를 본 적이 없었다. 유엔 평화 유지군 파견 기회도 거부했다. 교전수칙이 지나치게 억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극우 단체 활동과 마찬가지로 군 복무 역시 그에게 답 없는 질문만을 안겨줬다. “내 생각에 군에 가는 남자들은 누구나 전투를 하고 싶어 한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나는 항상 모험을 찾아 헤맸다.”

2011년엔 유럽을 여행하는 요르단 의사의 제안을 받았다. 시리아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를 위해 일할 용병을 찾는다고 했다. 급여와 모험 기회에 혹한 스킬트는 그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받아들이려 했지만 그 남자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가지 않은 게 다행이다.”

결국 스킬트는 최저임금을 받는 건설 노동자가 됐다.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지난해 2월 그는 1년에 3만2700달러를 벌었다. 계속 일하면 연봉 6만5400달러까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안정된 삶과 미래를 손에 넣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겁쟁이들. 스킬트가 키에프 독립광장에서 벌어진 학살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보면서 떠올린 말이다.

가장 신경에 거슬리는 건 저격수들이었다. 왜 시위자들의 다리를 쏘지 않는 거지? 스킬트는 생각했다. 아니, 대체 시위자들을 쏘는 이유가 뭐야? 모터사이클 헬멧을 쓰고 강철 방패를 든 남자가 무장 경찰에게 대체 어떤 위협을 가한다는 건데? 시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스킬트는 건설 현장에 있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력했다.

저격수들이 시위대를 학살하는 장면을 보면서 스킬트는 분노했다. 저격수들을 겁쟁이라고 생각했다. 저들이 저격수 대항 훈련을 받았는지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앞에서도 살아남을지 한번 보자고 말이다. “내 안에서 뭔가가 깨어났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아마 전사의 정신이었을 거다.”

깨어난 전사의 정신

지난해 2월 28일 키에프행 편도 비행기표를 샀다. 직장 상사에겐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로 가야 하는 이유를 여자친구에게 설명했다. “우리 관계는 그전에도 아주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그때 완전히 망가졌다”고 스킬트는 낄낄대며 말했다. “그녀와는 그대로 이별이었다.”

스킬트에게 줄 소총 한 정을 마련해놨다는 우크라이나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2월 21일 우크라이나를 떠나 도피했다. 2월 25일 혁명은 끝났다. 스킬트가 3일 뒤 키에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을 놓친 뒤였다.”

3월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병합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소문도 들렸다. 독립광장에서 탄생한 저항 세력은 군사조직에 가깝게 변해갔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무기만 있었더라면 크림 반도로 떠났을 거다.”

분리주의 운동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 돈바스 일대를 휩쓸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는 도미노처럼 차례로 함락됐다. 우크라이나가 둘로 나뉘리라고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다. 우크라이나 정규군은 러시아로부터 훈련과 장비, 무기를 제공받은 반군의 화력과 조직력에 허를 찔렸다.

스킬트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새로 창설된 아조브 부대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이미 친우크라이나 조직과 인연도 있었다. 지난해 4월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카리프에서 친러시아 분리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군이 폭력 사태를 벌였을 때 우크라이나편에서 함께 싸웠다. “우크라이나는 내게 목적을 줬다. 남자는 목적이 있어야 한다.”

스킬트가 처음 전투를 벌인 곳은 아조브해 해안의 인구 50만 명 규모 항구도시 마리우폴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군이 이 지역을 차지했다. 스킬트는 수많은 전쟁에 참전했지만 실제 전투를 겪어본 적은 없었다. 그에게 전쟁 경험은 음식이나 물·공기 만큼이나 절실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알고 싶었다. 용감하게 움직일까? 등을 돌리고 도망칠까,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갈까?

그해 6월 마리우폴에서 그 답을 찾았다. 반군이 스킬트를 향해 50구경 기관총을 쐈다. 스킬트는 수송기 뒤로 몸을 숨겼다. “적이 먼저 공격을 개시했다”고 그는 돌이켰다. “몸이 얼어붙었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온몸이 경직됐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몸 전체로 흘러드는 감각에 압도당해서다. 스킬트는 그 감각을 모두 떨쳐냈다. 차후에 그가 ‘작업 태세’라 부르게 될 순간을 처음 경험한 것이다. 생존에 필요 없는 생각·감정·감각은 사라졌다. 지금 여기라는 한 점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무아지경의 상태에 도달했다.

작업 태세에선 “나 자신은 모두 사라진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보통 나는 여섯 시간 동안 달리지 못하지만, 작업 태세에선 가능하다. 더 높이 뛰고 더 빨리 반응한다.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멀리서 보는 것처럼 축소된다. 어떻게 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인간을 벗어버리고 일종의 로봇이 되는 것 같다.”

스킬트와 동료는 빗발치는 총알을 뚫고 길을 건넜다. 총알이 소리 내며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아스팔트에 맞고 튀어 오른 총알이 다리에 스쳤다. 스킬트는 소리를 지르며 웃기 시작했다. 길 반대편 학교 건물 3층 창문으로 한 남자가 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총구를 들었다. 그 남자가 조준경에 들어왔고, 이내 쓰러졌다. 스킬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잠시 뒤 전투가 끝나자 스킬트와 동료들은 학교로 들어갔다. 아까 적을 발견했던 3층 방으로 올라갔지만 비어있었다. 적을 놓친 걸까? 무척 실망스러웠다.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너무 화가 나서 죽고 싶었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낙담한 채 서 있는 스킬트에게 사령관이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실패했는데 뭘 축하하지? 스킬트는 생각했다. 사령관은 스킬트에게 죽은 남자를 길에서 발견했다고 말했다. 폐를 맞고 기어서 건물 밖까지 나간 뒤에 죽은 것이다.

스킬트는 첫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생애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10시간 동안 교전을 벌였지만 생채기 하나 없었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그제서야 내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살아남았고, 전투도 잘 해냈다.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큰 수확이었다. 실제 전투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로 모른다.”

전장에서 국회로

스킬트는 프랑스 특수부대 출신 병사와 함께 키에프 시내의 한 바에 앉았다. 채식주의자인 그는 피자를 먹고 담배를 피우면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였다. TV에선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우크라니아 축구팀 드니프로와 나폴리의 유로파 리그 준결승 경기였다. 밖에선 비가 내렸고 점차 어둠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축구 경기장에 자리 잡은 아조브 부대 병사들은 거대한 우크라이나 국기를 펼칠 것이다.

스킬트는 그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TV에서 국기를 보기 전까진 바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경기를 보면서 자신이 겪었던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그때 한 젊은 아조브 부대 병사가 다가와 스킬트와 악수했다. 스킬트는 서툰 러시아어로 그에게 인사했다. 자신들과 함께 맥주 한잔하자는 제안에 스킬트는 내일 아침 일찍 신병 훈련이 있다며 거절했다.

스킬트는 보통 훈련소 내무실 침대에서 잔다. 여자친구 집에서 자도 되지만 병사들과 함께 자야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병사들과 떨어져 있는 1분 1초가 그들을 살릴 기회를 놓치는 시간이 될까봐 걱정이다.

화제는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앞날로 옮겨갔다. 스킬트는 2019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다. “우크라이나는 훌륭한 나라가 될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러시아가 내버려두기만 한다면 말이다.”

바가 술렁였다. 연장전이 끝나고 드니프로가 1 대 0으로 경기에서 이겼다. TV화면에선 거대한 우크라이나 국기가 바람에 휘날렸다. 승리를 자축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바를 뒤덮었다. 상쾌한 비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전쟁은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새로운 경지로 이끌 수도 있다”고 스킬트는 말했다. “한 사람의 인간성을 모조리 벗겨낸다. 하지만 결국 전쟁은 나를 훨씬 나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 필자는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에 참전했던 전직 공군 조종사다. 이 기사는 데일리시그널에 먼저 게재됐다.]

글=뉴스위크 NOLAN PETERSON / 번역 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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