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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김영란법 완화가 옳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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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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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욱
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도 소비가 부진했다.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가”라는 비판이 잇따르자 청와대가 그해 8월 홈페이지에 반박문을 올렸다. 내수 침체는 인정했다. 반박한 건 원인이었다. 통상적으로 지적돼왔던 양극화 심화에 따른 중산층 구매력 약화, 대규모 신용불량자 문제 등도 원인이라고 인정했다. 반론 포인트는 새로운 원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지하경제의 갑작스러운 멸실, 노후 대비를 위한 저축 증대를 들었다. 후자인 고령화 문제야 새 원인이랄 게 없다. 노후 대비를 위한 저축을 늘리면 소비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니. 새로운 건 지하경제의 멸실이었다. 청와대가 예로 든 건 직전인 2004년부터 시행된 기업의 접대비 지출 규제와 성매매금지법, 담뱃값 인상이었다. 이런 것들이 내수경기 회복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청와대는 내수를 살리기 위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지 않겠다고 했다. 내수 부진을 해결하겠다고 ‘눈먼 돈’을 허용하고 금연 정책을 완화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라고도 했다. 실리보다 명분을 택했다.

 10년 전 얘기를 길게 꺼내는 건 ‘김영란법’ 때문이다. 정확히는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등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법은 이미 통과됐고 내년 9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지금은 시행령을 마련하고 있는 중인데도 논란은 진행형이다. 한쪽에선 내수 부진을 우려하며 시행 연기나 예외 확대를 주장한다. 자칫 농수축산업계와 소상공인이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논리다. 다른 쪽에선 예외 없는 시행을 주장한다. 원칙과 개혁 명분을 강조하는 쪽이다. 10년 전과 판박이다.

 난 전자 쪽이다. 시행을 연기하거나 완화돼야 한다.

 녹록지 않은 지금의 경제 상황 때문이다. 우리 경제의 3대 축인 수출과 대기업, 제조업이 극심한 부진의 늪에 빠져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내수가 버텨주고,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이 뒤를 받쳐주면 그나마 나을 텐데 그걸 기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도. 저성장 고착화도 예사롭지 않다. 올해 우리 성장률은 잘해야 2%대 후반이다. 한국은행은 2.8%는 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잠재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저성장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무엇보다 이런 흐름이 2011년부터 5년째다. 내년에도 저성장이라면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10년’ 얘기가 절로 나올 게다. 생산가능인구가 역사상 처음으로 줄어드는 2017년부터는 저성장 탈피가 더 어려워질 게 자명해서다.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불확실하다. 일부 경제전문가들이 2017년 위기설을 주창하는 이유다. 게다가 일본은 그래도 10년 불황을 넘어 20년 불황도 견뎠지만 우리는 쉽지 않다. 비유하자면 일본은 부유한 은퇴 노인이지만, 우리는 통장에 잔고가 거의 없는 퇴직자 신세다.

 더 큰 문제는 이를 타개할 독자적 정책수단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중국 등 세계경제는 내년에도 여의치 않을 거다. 수출과 대기업, 제조업 경기가 쉽게 회복하지 못할 걸로 보는 연유다. 내수 부진은 고령화 및 양극화 구조와 결부돼 있어 재정금융 정책만으론 한계가 있다. ‘잃어버린 소비’가 10년째 지속되는 까닭이다. 미국 금리인상 충격도 상당하다. 이에 따른 가계부채와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는 내수 부진으로 이어진다.

 내수 침체를 가져올 게 명백한 김영란법이라도 완화하자는 건 그래서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구조개혁이라는 건 두말할 나위도 없다. 생산성을 높이고 실질임금을 늘리는 구조로 만드는 것, 김영란법은 이에 비하면 사소한 데도 거론하는 건 이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김영란법을 저성장 고착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힘을 합쳐 장기침체를 극복하는 차원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연기하거나 완화하는 게 옳지 싶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하자는 얘기다.

 첨언이다. 노무현 정부도 당초 추진했던 접대비 개혁 방침을 대폭 후퇴했다. 애초엔 향락성 접대비를 아예 폐지하겠다고 했다가 소비 침체 등의 이유로 허용하고, 그 한도도 여러 번 늘렸다. 여건이 달라지자 정책도 바꾼 거다. 김영란법이 달라야 할 이유 없다.

김영욱 금융연구원 상근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