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에 살다] (3) 토왕폭과 송준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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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72년 12월 30일, 설악산의 날씨는 빙벽등반에 이상적이었다. 맑은 가운데 바람도 적당히 불었다. 기온은 섭씨 영하 10도 안팎을 나타냈다. 토왕폭 허리부분의 빙질(氷質)도 적당한 탄력을 유지했다.

오전 11시쯤 송준호는 사흘 앞으로 다가온 D데이를 대비해 토왕폭 정밀 답사에 나섰다.

아이젠도 없이 피켈만 들고 토왕폭 빙벽 하단을 돌아 중단의 완만한 곳에서 오른쪽 설벽(雪壁)으로 나아가 상단의 출발지점을 볼 수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출발지점을 자세히 살펴본 후 정식 등반 때 쓸 장비 일부를 근처 눈더미 속에 묻어두고 산을 내려왔다. 설악동에 이르러 그는 요델산악회의 선배인 백인섭씨(현 아주대 교수)에게 전보를 띄웠다.

'토왕폭 빙벽의 상태가 등반에 최적임. 피켈.아이젠.아이스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준호'

이튿날 날씨도 맑았지만 약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오전 3시에 일어나 다시 설악동으로 간 송준호는 백인섭.박경립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송준호는 토왕폭을 혼자 등반키로 결심하고 함께 훈련했던 서울대 상대 산악부 소속 두명의 산사나이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다음날인 73년 1월 1일 아침. 영하 8도의 기온 속에 맑은 날씨였다. 송준호와 지원조 두 명은 설악동에서 등반에 필요한 몇가지 물품을 구입한 후 비룡산장으로 올라가 잤다.

이날 밤 산장에서 송준호는 '석주에게'라는-이승에서 저승으로 띄우는-묘한 편지를 썼다. 주소란에는 이렇게 적혔다.

받는 사람='석주귀하'

보내는 사람='준'

받는 사람 주소='노루목'

보내는 사람 주소='벽에서'

'잘 있었나. 그동안 나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네. 내일 벽과의 감격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등반할 나를 도와줄 S대 상대 OB인 J와 P 두 악우(岳友)를 소개하겠네.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두 사람이네. 석주도 고마워할거야. 나는 확신한다네. 아직 자네는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석주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한발 한발 힘차게 오를 것이네.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배하세! 좁은 지면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 걸세. 용아장성에서처럼.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네.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 받을 얘기는 토왕성의 하얀 벽 꼭대기에서! 여유를 가져보세. 1월 1일 설날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73년 1월 2일. 맑은 날씨는 여전했다. 영하 5도의 기온은 토왕폭 사나이의 긴장감을 유지하기에 적당했다.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는 비룡산장을 떠났다.

이들은 토왕폭 상단 40m 지점의 고드름 기둥까지를 1피치(자일 한묶음의 길이로 40m 안팎)로 잡고 그곳에 70m 짜리 자일을 고정시킨 다음 출발지점의 지원조로부터 1백20m 짜리 자일을 넘겨받아 토왕폭 상단 빙벽을 2시간 정도에 끝낼 계획으로 등반을 시작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
정리=김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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