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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살라는 건 무리 … 장기적으론 파탄주의 도입 불가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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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15면

15일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서 13명의 대법관 중 7명이 유책주의를 지지해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뉴시스]

우리나라의 이혼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부부가 상의해 간단한 절차 등을 거쳐 법적 관계를 정리하는 협의 이혼과 민법 제840조가 정한 이유를 근거로 한 재판 이혼이다. 많은 사람이 소모적 논쟁이 적은 협의 이혼(2014년 기준, 13만3345건)을 선택하지만 감정의 골이 깊어진 부부는 법정에 나가 서로를 할퀴며 마지막까지 싸운다(4만1050건). 이런 재판을 통한 이혼은 부부가 서로의 잘못을 증명해야 이길 수 있는데 이 방식이 바로 ‘유책주의(有責主義)’다. 대법원이 1965년 이후 원칙으로 삼고 있는 제도다. 유책주의는 선량한 배우자(미성년 자녀)가 잘못이 있는 배우자에게 버림받아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일종의 보호장치다.


 하지만 유책주의는 서로 비인간적인 공격을 하면서 부부는 물론 자녀들까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다. 법무법인 ‘정률’의 이찬희 변호사는 “소송에서 이기려고 모든 걸 들춰내다 보면 감정의 골이 더 깊어지고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돌이킬 수 없는 부부생활을 국가가 억지로 유지시키는 것도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시각도 있다. 사적 영역에 국가가 너무 많은 개입을 한다는 것인데 올해 2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된 간통죄 역시 이런 기류가 반영된 것이다. 신영호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이혼으로 인한 피해 등을 법원이 모두 보호해 줄 수는 없다”며 “법률로 선량한 피해자를 줄일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법학계와 법률 실무가들 사이에서 결혼생활이 사실상 끝난 상태를 현재의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파탄주의(破綻主義)’로의 전환이 현실적이지 않느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 15일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사건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른 여성과 15년간 살던 남편이 아내와 갈라설 수 있도록 해 달라며 낸 소송으로 유책주의와 파탄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A씨는 아내 B씨와 76년 결혼해 세 자녀를 뒀다. A씨는 결혼 20년이 되던 96년부터 다른 여자 C씨를 만났다. 2년 뒤 둘 사이에 딸이 생겼고 A씨는 2000년부터 집을 나와 C씨와 동거를 했다. 2011년 병에 걸린 A씨는 B씨와 아이들에게 장기 이식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하자 법적으로 갈라서기로 결심했다.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A씨가 이혼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봤다. 유책주의 원칙을 강조한 판결이었다.

30년간 有責 소송 171건, 44건 허용한국여성변호사회는 대법원 판결 직후 유책주의 환영 성명을 냈다. 간통으로 상처를 입은 배우자에 대한 제도적 보완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간통죄가 폐지된 데 이어 법원이 파탄주의까지 인정하면 상대적 약자인 여성 배우자를 더욱 궁지로 몰고, 소위 ‘축출(逐出) 이혼’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반면 법무법인 윈의 이인철 변호사는 “무조건 참고 살라는 건 무리”라며 “이번 판결은 과도기적이며 장기적으론 제도 개선을 통해 파탄주의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당장 A씨 사건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던 파탄주의 도입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대법관 13명의 전원합의체 사건에서 12명이 유책주와 파탄주의 6대 6 동수로 맞섰고, 결국 양승태 대법원장이 유책주의 쪽에 섰다. 그만큼 판단이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앞으로 제2, 제3의 A씨가 대법원의 문을 두드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조사한 30년간(1982~2012년)의 대법원 유책 배우자 이혼 청구사건은 모두 171건이었다. 이 가운데 이혼을 해도 좋다는 판단을 받은 것은 44건이다. 부부가 서로 소송을 내거나 배우자 일방이 보복성으로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 서로 잘못이 확실한 경우 등이었다. 그 외 사건에서 대법원은 유책 배우자에게 모두 ‘참고 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렇게 이혼 소송에서 유책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선진국은 대부분 파탄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독일, 3년 이상 별거 땐 파탄으로 인정우리 법원의 유책주의 모델이 된 일본은 28년 전 파탄주의를 도입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87년 바람피운 남편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여 세간을 놀라게 했다. 37년 결혼한 A씨와 아내 B씨는 아이가 생기지 않자 45년 여자아이 2명을 입양했다. 그런데 이듬해 B씨는 남편이 입양한 딸들의 친어머니와 계속 바람을 피우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됐다. 남편은 아이들의 친어머니와 동거를 시작했다. B씨는 홀로 어렵게 생활했지만 A씨는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 갔다. 51년 A씨는 아내를 상대로 법원에 이혼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바람피운 남편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84년, A씨는 다시 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제발 이혼시켜 달라는 요구였다. 3년 뒤 최고재는 A씨에게 이혼을 허락했다.


 최고재는 그 근거로 오랜 기간 별거(別居) 중인 점, 미성년 자녀가 없고 상대방이 정신적·사회적 등으로 가혹한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사회 변화 등을 반영해 책임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도 받아들이기로 한 첫 판결로 기록됐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대부분의 선진국도 파탄주의를 시행 중인데 가장 순수한 파탄주의를 적용하는 곳은 미국이다. 그렇지만 미국도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 보호에 각별히 신경 쓰고 있다. 이화숙 연세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미국 주(States)별 판결에서 보면 재산분할(財産分割)에서 유책주의적 요소를 담아 무책 배우자나 자녀를 보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집이 한 채일 경우 미성년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아이와 부양(扶養)하는 배우자가 (그 집에서) 지내도록 하고 성년이 되면 팔아 나눠 갖도록 하는 방식이다.


 영국·독일·프랑스의 경우 파탄주의 도입 시기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부작용 대책을 마련했다. 독일은 민법에 ‘부부가 3년 이상 별거한 경우에는 그 원인과 관계없이 혼인이 파탄된 것으로 보아 이혼을 허용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부부가 이혼해야 하더라도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 배우자에게 가혹한 결과를 초래하거나 미성년 자녀의 복지가 심각하게 침해되면 이른바 ‘가혹조항’을 이유로 이혼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국 무책 배우자 보호 장치 비현실적이런 장치는 우리나라에 없는 조항들이다. 대법원도 이번 선고 직후 파탄주의로의 전환에 대해 외국의 보호조항들을 언급하고 우리 법은 아무런 장치가 없다고 지적했다. 우리 가정법원이 재산분할과 위자료를 통해 무책 배우자를 보호하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경제 능력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실현가능성이 작다.


 서울가정법원 민유숙 수석부장판사는 “법원이 무책 배우자를 위해 재산분할에 적극 노력하더라도 재산을 빼돌리는 경우가 많아 현실적인 재산분할이 어렵다”며 “이런 것을 막을 수 있는 현행법 조항이 전무해 장기적으로 법률 개정을 통해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현재 퇴직연금에 대한 재산분할까지 인정되고, 국민연금을 분할 지급할 수 있는 규정은 마련됐지만 최근 사적 연금 등 다양한 방식의 금융자산이 늘어난 만큼 이를 이혼에 따라 분할 지급할 수 있는 조항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민법 등 법률 개정을 통해 파탄주의에 대한 보호장치가 준비되는 때가 대법원의 재논의가 이뤄지는 시점이 될 전망이다.


오이석 기자 oh.i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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