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박보균 칼럼

여의도 광장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박보균
박보균 기자 중앙일보
박보균
대기자

광장은 기억이다. 광장은 이미지를 뿜어낸다. 그것은 압박하듯 덮쳐온다. 천안문(天安門) 광장의 전승절 열병식은 위압적이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리무진 훙치(紅旗)에서 외쳤다. 중화 대국의 세상은 선포됐다. 광장의 풍광은 역사로 저장된다.

 그 장면은 여러 상념을 낳는다. 나의 머릿속에 여의도 광장이 떠오른다. 오래전에 사라진 곳이다. 건축가 김석철(국가건축정책위원장)씨와 전화했다. 그는 1970년대 전후 여의도 개발 디자인을 맡았다. 그의 목소리는 탄식이다. “여의도 광장이 없어진 게 너무 아쉽다. 넓은 그곳은 천안문 광장 이상으로 웅대했다.” 그의 회상은 선명해진다. “여의도 개발 때 박정희 대통령은 훗날의 통일에 대비했다. 남북한이 함께 어울릴 통일 광장으로 조성했다.” 통일은 장엄한 미래다. 광장은 컸다. 그 공간에서 장대한 내일에 대비했다.

 나의 감상은 과거로 뻗어간다. 89년 나는 러시아에 갔다. 소련 시절, 김영삼 대통령의 야당 총재 때다. 그의 모스크바 방문을 취재했다. 그곳 붉은 광장은 강렬했다. 냉전의 상징 장소였다. 그곳의 초대형 핵미사일의 도열 사진은 압도적이었다. 나는 그걸로 붉은 광장의 크기를 짐작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깨졌다. 여의도 광장의 절반쯤 됐다. 그것은 역설적인 충격이었다. 박정희 시대의 스케일은 광대했다.

 서울에 시청, 광화문 광장이 있다. 김석철의 평가는 실감 난다. “ 1000만 거대 도시와 어울릴 광장이 서울에 있는가.” 광화문 광장은 관광명소다. 하지만 도로와 격리돼 있고 좁다. 군부대 계룡대에 연병장이 있다. 여의도 광장을 대체하기엔 작다.

 여의도 광장의 해체 시점은 97년 4월이다. 담당은 민선 단체장인 조순 시장의 서울시였다. 명분은 공원(약 23만㎡, 6만9000여 평) 녹지와 휴식공간 확충. 아스팔트를 걷어내 푸른 숲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 정책 깃발엔 ‘개발독재 잔재의 폐쇄’라는 구호가 담겼다. 광장은 초라해졌다. 김대중(DJ) 대통령은 취임(98년 2월) 후 다른 관점을 내놓았다. DJ는 “서울에 걸맞은 큰 광장이 필요한데, 여의도 광장을 없애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제동을 걸기엔 늦었다.

 광장은 서사시(敍事詩)다. 국군의 날은 광장의 간판이었다. 그 시절 학생·시민 상당수가 행사에 동원됐다. 군사문화의 어두운 추억이다. 하지만 그것은 광장의 오랜 기억 중 부분이다. 그곳의 서사는 다양하다. 여의도 광장은 일제시대 비행장이다. 1922년 안창남은 단발 쌍엽기로 그곳에서 날았다. 5만 인파가 환호했다. 그는 ‘경성의 하늘’에서 한민족의 웅비를 예고했다.

 1945년 8·15 광복 사흘 뒤(8월 18일)다. 임시정부 선발 비행기가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광복군 정진대(挺進隊, 이범석·장준하·신일·노능서)가 탄 미군 수송기다. 김구의 임시정부가 고국 땅을 처음 밟은 순간이다. 감동은 벅찼다. “이윽고 (수송기의) 문이 열렸다.… 아, 그때 그 바람 냄새, 그 공기의 열기, 아른대는 포플러의 아지랑이.”(장준하 수기 『돌베개』)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달 18일 여의도 공원에서 C-47 수송기 전시회를 열었다. 장준하가 탔던 비행기와 같은 기종이다. 광장이 살아있다면 어땠을까. 광복 70주년 그 행사의 의미와 매력은 더했을 것이다.

 여의도 광장은 부국과 강병을 드러냈다. 60~70년대 그곳에서 베트남 파병, 수출 증진 대회도 열렸다. 그때 이름은 5·16 광장. 87년 12월 대통령선거 때다. 노태우와 야당의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경쟁했다. 그들은 여의도 광장에서 번갈아 집회를 열었다. 추운 겨울 그곳에 100만 인파가 계속 모였다. 절정에 오른 민주화 현장이었다.

 유럽의 역사는 광장의 역사다. 여의도 광장도 역사의 극적 장소였다. 광복,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동과 파란을 담았다. 하지만 광장의 철거는 허망했다. 그것은 굴절된 역사관이 낳은 비극이었다. 빈곤한 상상력은 도시의 졸작을 남긴다.

 박근혜 대통령은 70년대 후반 여의도 광장에 섰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국군의 날에서다. 박 대통령은 3일 성루 위에서 천안문 광장을 내려다봤다. 대통령은 두 광장을 비교했을 것이다. 여의도 광장은 복원해야 한다. 여의도 공원의 선도적 역할은 끝났다. 그 공원 이후 뚝섬 서울 숲, 북서울 꿈의 숲이 생겼다. 그 공원의 시범 임무는 완수됐다. 여의도 공원에 사람은 적다.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 아래 한강시민 공원이 있다. 여의도 주민 대부분은 한강 공원으로 간다.

 광장은 재탄생할 수 있다. 여의도 공원의 일부만 남겨놓고 나무는 옮기면 된다. 김석철의 부활 설계는 야심작이다. 그는 국회의사당과 연결해 광장을 재구성한다. 여의도 광장의 야망은 통일이었다. 그 비전은 재생산돼야 한다. 광장은 시대정신을 표출한다.

박보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