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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사건 줄인 미국, 대법관 늘린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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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은 으레 3심이란 생각은 낭비적·소모적인 잘못된 인식이다."(양승태 대법원장, 2014년 12월5일 전국법원장회의)

“당사자 간 다툼에 정의를 세우는 데는 두 번의 재판만으로 충분하다.” (윌리엄 H 태프트 전 미국 연방대법원장, 1922년 3월 하원 사법위원회)
양승태 대법원장의 상고법원 구상엔 미국식 정책법원과 유럽식 권리구제법원 사이에서 상고사건 폭증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고심이 깔려 있다. 미국은 1900년대 초반 상고 건수가 수만 건으로 폭증해 상고심 판결을 받는 데 6년 이상이 걸렸다. 대통령 출신으로 10대 연방대법원장에 취임한 태프트는 "미국 헌법과 연방법률의 중요 사안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연방대법원의 사건 수를 줄여야 한다"고 의회를 설득했다. 1925년 상고허가제를 골자로 하는 법원조직법(Judiciary Act)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후 연방대법원은 매년 8000여건의 상고 신청 사건 가운데 80건 안팎만 상고를 허용한다.

독일·프랑스는 상고심 법원과 법관 수를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대법관 증원론'과 유사하다. 독일의 경우 연방일반법원(BGH)과 행정ㆍ재정ㆍ노동ㆍ사회 등 4개의 전문법원에서 320여명의 법관이 상고사건을 나눠 재판한다. 민사 사건에 대해선 상고허가제를 도입해 대법관 1인당 처리사건(약 35건)이 한국 대법원의 100분의 1에 불과하다. 대신 헌법재판소가 헌법·연방법률의 최종 해석권을 갖는 정책법원 역할을 한다. 프랑스도 헌법위원회와 최고행정법원인 국사원(Conseil d'Etat)과 별도로 설치된 파기원(Cour de cassation·법관 129명)에서 상고사건을 처리한다.

상고법원안은 대법원이 중요 사건을 맡고(미국식), 상고법원에서 일반 사건을 맡음(유럽식)으로써 모든 사건에 세 번 재판받을 기회를 주는 것이다. 결국 미국과 유럽 모델 사이의 '절충형'인 셈이다. 양 대법원장은 “상고허가제가 이상적이지만 국민들의 상고심에 대한 열망을 외면할 수 없어 나온 아이디어가 상고법원”이라고 설명했다.

법학계에서도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다. 한양대 로스쿨 박재완 교수는 “대법관을 30~40명으로 증원하면 인사청문회 때마다 법원이 정치권에 휘둘리게 된다”며 “상고법원안이 법적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동대 법대 이국운 교수는 “상고법원을 신설하면 제왕적인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한 사법관료제가 강화될 것”이라며 “헌재가 유일한 정책법원이 되고 전문 상고심 법원을 설치하는 독일 모델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상고법원 판사에 대해 추천 혹은 청문 절차를 도입해 민주적 정당성을 높히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 법조 경력 15년 이상인 부장판사급 190명을 1심에 배치하고 판사 370명을 증원하는 등 1·2심을 강화하는 보완책도 내놨다.

이에 대해 서강대 로스쿨 임지봉 교수는 "상고법원 설치는 헌법에 규정된 법원 구조를 뒤흔든다는 점에서 개헌에 준하는 사안"이라며 "보다 폭 넓은 공론화를 통해 국민들의 공감대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장혁 기자·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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