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 가게 창밖의 남과 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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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호 34면

당은 주말에 더 빨리 떨어지는 것 같아. 토요일 아침에는 아주 단 도넛이 당기거든.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출근해. 우린 토요일이 가장 바빠. 고객이 주로 직장 다니는 미혼이니까. 평일보다는 아무래도 시간 여유가 있는 주말에 상담하러 많이 오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당이 필요하지. 남들 쉬는 토요일에 출근하는 자신에게 뭔가 달콤한 당으로라도 위로해주고 싶거든.

토요일 아침 출근 전에 나는 사무실 근처 도넛 가게에 앉아 있었어. 통 유리로 된 창가 자리에서 아주 단 도넛과 커피를 흡입하면서 말이야. 당이 몸 안으로 들어가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 비로소 시야가 넓어지고 주위를 둘러보게 되더라. 나는 보았어. 맞은 편에 앉은 여자가 나를 보는 것을. 어쩌면 아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몰라.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창 쪽으로 눈길을 돌렸어.
언제나 의식이 문제야. 의식하기 전에는 여자가 거기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한번 의식하고 나니까 보지 않아도 여자가 보여. 점점 뚜렷해지고 커져 가게 안이 여자로 채워져. 이 세계가 온통 그 여자로 채워지는 거야. 한번 의식하고 나면 계속 의식하게 돼. 커피를 마시는 동작도 책을 읽는 행동도 창 밖을 보는 눈길도 뺨을 쓰다듬는 손짓도 모두 의식적이 되는 거야. 습관이고 버릇이었는데 부자연스럽고 어색해진 거지. 마치 카메라 앞에 선 것처럼 말이야.
여자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좋았어. 책을 읽고 있었어. 무슨 책인지 궁금했지만 알 수는 없었어. 여자는 책에 집중하지 못했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몇 줄 읽다가 고개를 들고 문쪽을 보고 몇 줄 읽다가 창 밖을 보고 또 보았어. 여자는 전혀 나를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어. 잠시 보고는 금세 관심의 스위치를 끈 것이 분명해.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 가끔 여자가 내 쪽을 볼 때도 그 눈길은 내 너머를 보는 것 같았어.
내 너머 통 유리창 바깥에는 테라스가 있어. 주말 이른 아침 시간이라 거기엔 아무도 없었는데 유리를 가운데 두고 바로 내 옆자리에 한 남자가 와서 앉았어. 잠깐 남자와 나는 눈이 마주쳤어. 언제나 의식이 문제야. 의식하기 전에 내 옆자리는 그냥 하나의 풍경이고 정물이었는데 한번 의식하고 나니까 창 밖은 온통 남자로 채워지는 거야. 보지 않아도 보여. 남자는 나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나보다 조금 많은 것 같았어.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에 흰머리가 많았지만 얼굴은 젊어 보이고 어딘지 지성이 느껴지는 외모였어. 남자는 앉아서 에코 백에서 책을 꺼내 읽었어. 그러니까 창을 사이에 두고 안에는 여자가 밖에는 남자가 대각선으로 마주앉아 책을 읽고 있는 토요일 아침이었어.
두 사람은 서로를 의식하는 눈치였어. 내가 본 것은 고개 숙인 여자를 남자가 보는 모습과 책 읽는 남자를 여자가 보는 모습이 다였지만 그건 꼭 눈으로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지. 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남자가 읽던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아주 느린 동작으로 말이야. 느린 동작에는 슬픔이 들어있는 것 같아. 가령 영화 ‘화양연화’의 느린 화면처럼 말이야. 남자가 느리게 테라스에서 거리로 걸어가는 것과 동시에 여자도 갑자기 잊고 있던 약속을 떠올린 것처럼 가방을 챙겼어. 조용하고 민첩하게 그러나 느린 동작으로. 그때 여자가 읽고 있던 책을 보았는데 제목이 『사는 게 뭐라고』였어. 여자가 일어나서 도넛 가게를 나가자 나도 마음이 바빠져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어.
가게 앞 길은 사거리인데 여자는 남자가 간 길로 갔어. 나는 보았어. 남자가 언덕 끝에서 여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쪽을 돌아보며 서 있는 것을. 여자는 그 남자에게로 가는 것처럼 종종걸음으로 걷는 것을. 그리고 둘이 서서 무슨 말인가를 몇 마디 주고 받는 것을. 여자가 남자의 손을 잡는 것을. 남자가 돌아서서 여자와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는 것을.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어. 갑자기 다시 떨어진 당을 보충하기 위해, 느린 동작으로 도넛 가게로 돌아가기 위해. ●

김상득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에 근무하며, 일상의 소소한 웃음과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아내를 탐하다』『슈슈』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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