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뛰지 못해 서러웠던 소년… 걸어서 세계 톱10 든 남자, 김현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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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톤처럼 도로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는 육상 종목이 있다. 경보(競步)다. 두 발이 동시에 공중에 뜨면 안 되는 규칙 때문에 '오리 궁둥이' 같은 자세가 눈길을 더 끈다. 생소하면서도 독특한 육상 종목, 경보에서 세계 톱10에 꾸준하게 이름을 올린 한국 선수가 있다. 자신의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남자, 김현섭(30·삼성전자)이다.

김현섭은 23일 중국 베이징 국립경기장 주변 도로에서 열린 2015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경보 남자 20㎞에서 1시간21분40초를 기록해 10위에 올랐다. 2011년 대구 세계선수권 6위, 2013년 모스크바 세계선수권 10위에 이어 한국 육상 최초로 세계선수권 3연속 톱10에 올랐다. 레이스 중반 16~17위까지 쳐졌던 김현섭은 막판 혼신의 힘을 다했고, 10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한국 경보는 실업팀 등록 선수가 10명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다. 불모지 같은 환경에서 김현섭은 '가뭄에 단비'같은 존재다. 강원도 속초 설악중 1학년 때부터 육상부원이었지만 2년 뒤 선수 생활이 끊길 위기를 맞았다. 정상급 여자 선수보다 잘 뛰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현섭은 "처음엔 중장거리 선수로 뛰었다. 육상부가 있는 인근 여자 중학교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면 질 때가 많았다. 지도하셨던 감독님이 '뛰지 말고 차라리 경보하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에 선택의 여지 없이 종목을 바꿨다"고 말했다.

김현섭은 기본기부터 탄탄하게 다졌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2004년 세계주니어선수권 1만m 경보에서 동메달을 땄다. "경보로 바꾼 게 내 인생을 바꿨다"던 김현섭은 성인 무대에 올라 20㎞ 한국신기록을 6차례 작성하고, 아시안게임 3회 연속 메달을 땄다.

아픔도 있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23위),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34위) 등 높은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무엇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관심이 아팠다. 그때마다 그는 운동화 끈을 고쳐 메고 갈 길을 갔다. 큰 대회를 준비할 때마다 두 달간 약 1000㎞를 걷고, 무릎과 골반이 뒤틀리는 아픔 속에도 한국 경보의 자존심을 지켰다. 그는 "지금은 식당에서 알아보시는 분도 있다. 오리 걸음에서 파워 워킹으로 경보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현섭의 다음 목표는 내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메달권 진입이다. 그리고 36살까지 도로를 누비는 게 꿈이다. 36살이 되는 2020년엔 도쿄 올림픽이 열린다. 그는 "이제 조금씩 경보가 알려지고 있는데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이 없다. 외롭게 여기까지 온 나의 전철을 후배들이 밟게 하고 싶지 않다. 힘 닿는 데까지 선수로 남겠다"고 말했다.

베이징=김지한 기자 han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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