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착 103이 등장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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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제37기 왕위전 본선리그 제20국
[제8보 (103~117)]
白.曺薰鉉 9단| 黑.趙漢乘 6단

중앙은 허공일 수 있고 동시에 대박이 터지는 보물창고일 수 있다.

프로는 아무튼 중앙을 싫어한다. 보기엔 근사하다가도 순식간에 지푸라기로 변하곤 하기 때문이다. 曺9단 역시 초반 좌상에서 강력하고 두툼한 세력을 얻었지만 '없는 자식' 취급하고 바둑을 두어왔다.

曺9단의 이런 마음가짐이 趙6단에게도 전이되었을까. 백의 세력은 분명 존재하건만 趙6단도 이 세력을 별로 신경쓰지 않고 있다. 백?로 뛰자 중앙은 제법 입체적인 무드를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A쪽과 B쪽이 터져 있어 집이 되려면 먼 느낌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상황을 설명하느냐 하면 바로 이 대목에서 趙6단의 패착 103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수는 우변 백을 공격해 대가를 얻어내겠다는 푸른 꿈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 수는 무르익어가는 거대한 중앙을 외면한 채 패망선을 향하고 있어 첫눈에 불길한 예감을 안겨준다. 103은 '참고도'처럼 중앙을 한칸 뛰어 연결해 두는 것이 정도였다. 백이 살 때 5 정도로 삭감하면(曺9단은 E도 가능하다는 주장) 흑도 충분한 형세였다.

104,106. 曺9단의 움직임이 고양이처럼 조용해졌다. 곧잘 중얼거리는 曺9단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까닭에 분위기는 더욱 음산하다. 흑은 공격을 시작했으면 104,106에 대해 진로를 가로막아야 한다. 그러나 상대는 무조건 끊어버릴 것이다.

우변 백은 D가 선수여서 포위돼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끊긴 흑은 사투를 벌여야 한다. 趙6단은 그런 생각을 하며 107로 호흡을 고른다. 선수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曺9단이 갑자기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108로 중앙을 틀어막더니(흑은 109로 백 일곱점을 잡았다) 110으로 두텁게 호구해 111의 수비를 강요한다. 그리고 116까지…. 중앙이 눈깜짝할 사이에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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