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논쟁

저성장 기조, 뉴 노멀로 받아들여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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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초점-올 경제성장률이 3% 달성도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에 일각에선 이젠 각종 경기 부양책을 통해 성장률을 끌어올리던 기존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우리도 저성장을 새로운 경제질서, 즉 뉴 노멀(New Normal)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한편에선 산적한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여전히 성장정책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양측 논리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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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성장력 제고가 중요하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거시경제 담당 수석연구위원

2011년 이후 경제 전망 기관들은 매년 그 다음 해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성장률이 정체되거나 더 떨어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이 세계경제 전망을 과도하게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가운데 세계 전망에 기초한 국내 연구기관들의 우리 성장률에 대한 판단도 항상 실제치보다 높았다.

 성장 전망의 상향 편의 현상은 경제에 구조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을 때 나타난다. 경제전망 모형들은 과거의 흐름에 기초해 미래를 판단하기 때문에 구조 변화를 포착해 내기 어렵다. 이에 따라 현재의 성장세가 과거의 평균적인 흐름보다 낮을 경우 내년에는 성장세가 더 높아질 것으로 진단하게 된다. 수년째 회복이라는 표현이 계속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는 경제가 다시 과거의 흐름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접어야 할 때다. 우리나라의 잠재적인 성장 능력은 이제 2%대로 낮아진 것으로 판단된다. 무엇보다 그동안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수출이 성장을 주도하기 어려워졌다. 지금 세계 경제는 수출 주도 국가들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선진국 경기가 회복돼도 수입이 늘지 않는 것이다. 위기를 겪은 선진국 소비자들은 내구재를 사는 대신 헬스케어, 여가 등 서비스 소비에 치중하고 있다. 더욱이 자체 제조업 생산을 강조하면서 수입보다는 자국산 제품 소비를 늘리는 상황이다. 중국은 철강·화학 등 소재산업, 디스플레이 등 전자부품과 첨단 스마트폰까지 전방위적으로 우리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또한 통화가치 약세를 바탕으로 일본 기업, 심지어 유럽 기업들마저 다시 부활하면서 우리 기업들을 위협하는 상황이다.

 수출제조업의 위축은 우리나라가 과거와 같은 높은 생산성 상승과 자본투입 확대를 재현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생산가능인구가 내년을 정점으로 감소하면서 노동 투입도 빠르게 둔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결국 2%대의 낮은 성장세는 우리 경제가 과도하게 위축된 데 따른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 될 현상이 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을 고려해 보면 단기적인 부양을 통해 성장률 목표를 맞추는 경제정책은 위험하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 등 일시적인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올해에는 추가적인 재정투입이 불가피했지만 만약 앞으로도 3% 이상은 성장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재정정책을 펼치게 된다면 매년 국가부채가 누적적으로 증가하면서 성장률도 높이지 못했던 과거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향후 경제정책의 방향은 단기적인 경기 진작이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 제고에 맞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노동시장 등을 중심으로 구조개혁을 서둘러야 한다. 한때 잘나가던 국가가 추락해 경제 위상이 회복되지 못한 대표적 사례로 1970년대 이후 브라질·멕시코, 그리고 80년대 이후 이탈리아·그리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오일 쇼크 등 위기 극복 과정에서 재정건전성이 저해됐다는 점과 함께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주변 국가에 비해 크게 높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노동유연성 지표의 국제적인 순위가 다른 부문에 비해 매우 낮은 상황이다. 고용과 임금 관련 유연성을 높이는 노력이 시급하다.

 다음으로는 내수시장을 확대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이다. 우리는 경제규모에 비해 여가문화나 헬스케어 등 내수산업 발전이 매우 미흡하다. 국민들은 이 부문의 수요를 늘려 삶의 질을 높이고 싶지만 가격이나 품질 면에서 만족할 만한 서비스가 별로 없다. 국토면적이 좁아 지가가 비싸고 도로 사정도 열악한 데다 여러 가지 규제가 많아 내수 서비스 산업이 발전하지 못했다. 국유지 활용 제고와 인프라 구축, 과감한 규제완화를 통해 내수 부문에서 커다란 시장을 만들어야 이 안에서 고용과 생산, 소비 증가의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내수 부문이 독립적으로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거시경제 담당 수석연구위원

산적한 경제 현안, 성장이 답이다

송권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

과거 1990년대에 ‘패션 1번지’로 불리던 압구정이 요즘은 ‘텅 빈 거리’로 전락했다. 뒤늦게 2012년 지하철이 개통됐지만 옛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대중의 성향과 트렌드는 쉬지 않고 변한다. 상권을 특성화하고 다양화하는 데 실패한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이제 청담동 명품 거리와 신사동 가로수길을 즐겨 찾는다.

 오렌지족 사례를 꺼낸 것은 역동적으로 변하는 상황에서 현상 유지만 꾀하는 것은 몰락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비단 상권 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기업의 성공과 실패도 그러하다. 국가 경제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다.

 올해 초부터 “3% 성장에서 행복을 찾자”거나 “3% 성장도 충분하다” 또는 “성장률 3%가 낮나?”라는 목소리가 눈에 띄게 늘었다. 3%대 성장이 가시화된 것은 2011년부터다. 세계경제가 1990~2010년에 연 3.6% 성장하는 동안 한국은 연 5.9%씩 성장했다. 그런데 이런 추세가 4년 전부터 반전됐다. 경제성장률에 대해 내년에는 나아질 것이란 막연한 기대와 관용의 자세로 대했는데, 어느새 3% 성장이 편안해졌고, 올해 2%대 성장 전망이 나오는데도 우리 경제에서 위기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 국민 사이에는 성장률이 한낱 숫자로 나와는 무관하다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경제성장률은 국민경제가 얼마나 활발하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경제 역동성의 바로미터이고, 국민경제의 풍요와 안정성을 보여주는 종합지표에 해당된다.

 성장률이 떨어진다는 것은 생산의 관점에서 기존 주력 산업의 노후화와 신성장동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실제 우리나라 10대 수출품목이 10위권에 오른 지 평균 22년 이상으로, 신산업이 태동해 주력 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정체 현상이 지속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의 관점에서 낮은 성장률은 고용의 4분의 3을 책임지는 기업 활동이 위축돼 고용률이 정체되고 실업률이 상승하는 한편 근로자의 근무 강도가 팍팍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의 나머지 4분의 1을 맡는 자영업자들도 신산업 부재로 모두가 같은 도소매업, 숙박 및 음식점업, 운수업 등 소수 특정 산업 중심으로 한정된 파이를 두고 경쟁이 격화되면서 벌이가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양극화 해소의 측면에선 성장률 하락이 소득분배의 악화로 이어진다.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1% 증가하면 소득 불평등 수준을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0.3% 낮아지고 불평등이 개선된다(오정근, 2012). 실제 90~97년에 경제성장률이 7~8%에 달한 고성장기엔 중산층 비중이 75%로 두터웠는데 외환위기를 거치며 성장률이 떨어지면서 이 비율이 60%대로 크게 낮아졌다.

 결국 경제가 저성장에서 벗어나 정상궤도를 회복해야 근로자·자영업자·기업 등 각 계층에서 활력이 제고된다. 그래야 고용률과 자영업자 수익성이 좋아지고, 소득분배가 개선돼 중산층이 탄탄해질 수 있다.

 경제성장률을 높이기 위한 방안은 공급 혁신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창조경제, 규제개혁, 기업 하기 좋은 환경 조성을 통해 신산업, 신직업을 만들고 기업 활동을 촉진해 성장잠재력을 근본적으로 높이는 것을 뜻한다. 일각에선 임금·재정·복지 확대 등을 통해 시장 수요를 늘려 경기 부양을 하는 방안을 주장한다. 이는 과거 일본에서 90년대 장기불황 초입에 추진한 상품권 지급, 재정지출 확대, 금리 인하 등 수요 진작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 빠진 전례를 볼 때 그 효과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 경제는 지금 지속 성장과 정체의 기로에 서 있다. 1인당 GDP가 2006년 2만 달러에 진입한 후 아직까지 3만 달러를 넘지 못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국민·기업·정부·정치권이 성장과 혁신을 위한 열정과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우리 국민은 어느덧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데 지친 것 같다. 그러나 성장과 변화 없는 현실 안주가 더 큰 고통을 가져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송권근 전국경제인연합회 경제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