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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호적' 옮기는 벤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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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동영상 셀카 애플리케이션 ‘롤리캠’으로 유명한 ‘시어스랩’의 정진욱(43) 대표는 얼마 전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회사에 투자한 해외 벤처캐피털(VC)과 논의한 끝에 본사를 미국 팰로앨토로 옮기기로 한 것이다. 정 대표는 “시장이 국내보다 큰 데다 각종 창업 지원이 풍부해 회사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며 “성공적인 엑시트(벤처기업이 성장한 뒤 회사를 매각해 자금을 회수하는 것)를 위해서라도 기업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 미국에 본사를 두는 것이 유리하다 ” 고 설명했다.

 해외로 ‘호적’을 옮기는 벤처가 늘고 있다. 한국에서 주로 개발·서비스 등이 이뤄지지만 본사를 외국으로 옮기거나 아예 창업할 때부터 본사를 해외에 두는 것이다. ‘쿠팡’을 서비스하는 ‘포워드벤처스’와 ‘블라인드앱’을 만든 ‘팀블라인드’는 본사 소재지가 미국 델라웨어다. 온라인 수학 교육기업 ‘노리’와 모바일 쇼핑기업 ‘티드’는 뉴욕, 기업 정보·평판 사이트 ‘잡플래닛’을 운영하는 ‘브레인커머스’와 모바일 보안기업 ‘에스이웍스’는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다. 세금이 상대적으로 적고 각종 규제에서 자유롭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브레인커머스’의 윤신근 대표는 “한국에선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벤처가 투자를 받을 곳이 많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는 정부의 창업지원 정책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의 벤처 생태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의미다. 우선 초기 창업투자에서 엑시트에 이르는 통로가 막혀 있다. 맥킨지앤드컴퍼니에 따르면 2013년 국내 벤처가 인수합병(M&A)을 통해 엑시트한 사례는 전체의 0.4%에 불과했다. 미국은 61.4%가 M&A로 벤처 성공신화를 쓴다. VC의 지원을 받은 벤처가 기업상장(IPO)에 이르는 기간도 평균 12년으로 중국(3.9년)·미국(6.8년)과 차이가 난다. 창업에 성공해 회사를 번듯하게 키워도 제값을 받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각종 규제도 ‘벤처 이민’을 부추기는 이유다. 미국의 랜딩클럽·온데크 등 온라인으로 개인 간 대출을 중개하는 핀테크 기업은 국내법을 따르자면 불법이다.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창업→성장→엑시트→투자 혹은 재창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끊기면서 벤처 생태계에 악영향을 준다. 국내 경제에도 적잖은 부담이다. 세수가 줄고 국내 고용창출 기회가 사라진다. 맥킨지 김주완 파트너는 “성공적으로 엑시트한 ‘빅 위너’가 많이 나와 줘야 이들이 재원을 다른 벤처에 투자하고, 새로운 벤처가 탄생해 일자리를 창출하며, 우수 인재들이 벤처로 뛰어드는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심재우(팀장)·구희령·손해용·박수련·이소아·이현택 기자,
사진=신인섭·오종택·강정현 기자, 정수경 인턴기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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