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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경계선 외줄타기 하는 자이니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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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헌
이정헌 기자 중앙일보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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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특파원

일본에서 태어나 평생 일본 말을 쓰면서 살았다. 일본 학교를 다녔고 일본 회사에 취직해 12년간 일했다. 그런 그에게 2013년 5월 일이 터졌다. 업무를 끝내고 동료 10여 명과 함께 저녁 종례에 참석했을 때다. 6개월 전부터 사이가 틀어진 사장이 그를 지목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람은 재일 한국인이다.” 그러면서 “자네, 이젠 조선 이름을 밝히는 게 어때?”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무리한 업무 지시에 따르지 않자 보복 차원에서 그의 국적을 폭로한 것이다. 일본인 동료들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일본 시즈오카현에 사는 야마하라 신이치(山原信一·47)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온몸이 뜨거워지고 식은땀이 솟구쳐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른바 ‘자이니치(在日)’로 불리는 재일교포다. 한국 국적을 가진 특별영주자다. 제신일(諸信一)이란 한국 본명도 있다. 하지만 일본 이름을 이른바 통명(通名·보통 불리는 이름)으로 줄곧 사용해 왔다. 어릴 적부터 일본인들 틈에서 일본인처럼 살았다. 사실 그의 몸속엔 한국인과 일본인 피가 반반씩 흐른다. 아버지는 일본인 조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할머니가 이혼 후 한국인과 재혼하면서 아버지는 한국 국적을 갖게 됐다. 어머니는 자이니치다.

 자이니치의 삶은 한국과 일본 경계선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롭다. 두 나라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한다. 일본 법무성에 따르면 현재 한국 국적의 특별영주자는 35만여 명. 일본 이름을 쓰며 일본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어도 일본 귀화는 선뜻 결심하기 어렵다. ‘모국을 버릴 수 없다’는 가슴 속 뜨거움과 ‘자칫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우려가 뒤섞인 경우가 많다. 사업가들은 ‘조선인은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구호가 난무하는 혐한(嫌韓) 시위를 지켜보며 일본 이름을 버리는 게 쉽지 않다. 당장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부터 어려워지지 않을까 걱정이 크다.

 야마하라는 사장을 상대로 시즈오카 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옛날에 비해 한국 본명을 쓰는 사람이 늘고 있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라고 다른 사람이 강요해선 안 된다”고 호소했다. 1심 재판부는 그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 이름과 일본 이름 중 어떤 걸 사용할지는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사항”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법정 투쟁 과정에서 그는 해고됐다. 사장은 항소했다. 다음달 2일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항소심이 시작된다.

 자이니치들은 조심스럽다. 힘겹지만 한국 이름을 쓰며 살아온 이들과 단순 비교되는 걸 우려하고 있다. 국적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인격권·성명권 문제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다. 일본에서 살게 된 경위나 처한 상황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으로 고국의 여론을 살핀다. 광복 70년, 혹시 한국 사회는 유독 ‘재일교포’에게만 여전히 ‘독립운동가’의 삶을 버티라고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정헌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