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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영의 오늘미술관] 쉬빙, 『지서(地書)』

중앙일보

입력

위 그림은 책의 한 페이지다. 이 책은 120쪽의 이모티콘 무더기로 이뤄져 있다. 글자가 하나도 없는 책, 이번 주에 출간된 쉬빙(60)의 『지서(地書)_점에서 점으로』다. 세상의 온갖 이모티콘으로 이뤄진 이 책은 샐러리맨 ‘미스터 블랙’의 24시간을 묘사하고 있다. 알람이 울리자 잠을 깬 블랙은 변기를 타고 앉아 ‘고군분투’하고,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고, 지하철에서 앉아 보려고 눈치를 보며, 사무실에서 긴장해 땀흘리며 프리젠테이션을 한다. 저녁에 만난 친구는 제풀에 만취해 버려 어쩔 수 없이 술값을 뒤집어 쓴다. 2012년 중국에서 첫 출간된 후 미국ㆍ대만ㆍ프랑스ㆍ멕시코 등지에서 나왔다. 글자가 없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같은 모양이 책이며,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비슷한 삶이다. 우리 또한 점일 뿐, 비슷비슷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덧없다.

쉬빙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부원장은 문자에 예민한 예술가다. 직접 고안한 가짜 문자로 목활자 4000개를 만들고, 그 활자로 인쇄한 책을 전시장에 설치한 ‘천서(天書ㆍBook from the Skyㆍ1989)’, 만리장성을 탁본한 거대 설치작업(Ghost Pounding the Wallㆍ1990), 9ㆍ11 테러 현장의 먼지로 전시장 바닥에 글씨를 쓴 ‘먼지는 어디에서 왔을까(2004)’ 등이 대표작이다. 어머니는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였다. 바쁠 때면 어린 쉬빙을 도서관에 데려다 놓고 일했다. 읽을 수 없는 거대한 책더미에서 그는 성장했다. 소학교에 들어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됐지만, 이번엔 읽을 책이 없었다. 문화혁명기의 중국에선 마오쩌둥 어록만이 책이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자 그는 미국 위스콘신으로 건너갔다. 영어에 서툰 그는 메디슨대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처럼 읽을 수 없는 책들에 포위됐다.

『지서』는 이 같은 문자 감수성의 산물이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책이다. 저자는 7년간 전세계를 돌며 수집한 2500여 개의 보편적 기호만으로 이야기를 구성했다. 제시한 페이지는 책의 10쪽, 주인공이 알람을 끄고 침대에서 나와, 화장실에서 애도 써가며, 출근을 준비하는 장면이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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