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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재벌개혁’ 법과 제도만으론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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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재벌개혁론’으로 확산되면서 여야 정치권도 재벌개혁에 대한 논의에 본격 돌입했다. 새누리당은 오늘 당정회의를 열어 재벌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책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은 5일 경제민주화 토론회를 열고 재벌 문제를 논의했다.

 이런 재벌개혁론은 단지 롯데 일가의 수준 낮은 싸움에 대한 염증 때문만은 아니다. 롯데는 재계 5위, 국내에만 81개 계열사에 협력업체를 포함해 35만 명의 근로자가 일하는 기업집단이다. 그런데 정부와 금융권조차 지배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는 깜깜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적은 지분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이용해 기업을 지배하는 오너 일가의 황제 경영, 자식들의 경영권 승계를 당연시하는 전근대성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불투명성과 불안정한 지배구조, 탐욕과 퇴행적 사고 등 재벌의 적폐가 한꺼번에 노출된 것이다.

 재벌개혁론의 확대엔 이뿐 아니라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같은 오너 일가의 부적절한 처신에다 최근 기업 승계 과정에서 외국 펀드들로부터 경영권 공격을 당하는 사례가 늘면서 우리 사회에 ‘재벌 피로감’이 누적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재벌개혁의 수단은 마땅치 않다.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하는 등 재벌 규제법을 정비했다. 기업들도 순환출자 해소에 노력하는 등 투명성이 개선됐고, 이에 따라 3·4세 승계가 여의치 않은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롯데 사태를 계기로 비상장사의 정보공개 의무를 강화하자는 주장도 나오지만 이를 통해 외국 기업까지 규제할 수는 없다. 또 기존 순환출자를 해소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럴 경우 우리나라 주력 기업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법과 제도만으로 재벌을 개혁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우리 사회의 대응엔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재벌은 악순환의 블랙홀” “노동개혁과 재벌개혁 연계” 등 정치권의 주장도 대안보다는 자극적 구호 일색인 경우가 많다. 또 롯데 사태가 불거지자 사정 당국과 세관·공정거래위 등이 한꺼번에 기업에 대해 ‘집중점검’에 들어가고, 소비자들은 불매운동에 나서는 등의 감정적 대응으로 기업에 타격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는 재벌이 아니라 우리 경제를 망치는 길이다.

 기업 지배구조엔 정답이 없다. 오너 기업이 전문경영인 기업보다 효율적이라는 연구도 많다는 점에서 무조건 오너 지배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재벌들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경영인이 아닌 직원으로 기업에 힘을 보태고 경쟁을 통해 최고경영자(CEO)에 오르는 일본 도요타 가문이나 ‘존재하되 드러나지 않는다’는 원칙의 스웨덴 발렌베리가 등 존경받는 재벌의 사례는 많다. 재벌은 재벌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우리 사회에 바람직한 재벌가의 미래상’을 고민하고 토론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