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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 비디오 아트 작품성에 큰 영향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1974년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 백남준기과본 함 사께이한즈 구보타 시게코. [중앙포토]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구보타 시게코(久保田成子·작은 사진)가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지병으로 타계했다. 78세.

구보타는 40년 넘게 살아온 뉴욕 머서가의 아파트에서 근 10년간 쓸쓸히 홀로 살아왔다. 국내에선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역시 세계적 미술잡지 ‘아트 인 아메리카’ 표지에 작품을 실을 정도로 인정받던 비디오 아티스트였다. 특히 ‘현대미술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裸婦)’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꼽힌다.

이런 창의성으로 구보타는 1964년 도쿄 나이콰(Naiqua)갤러리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백남준의 부탁을 받아 감행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는 사타구니에 붓을 꼽고 그림을 그리는 ‘버자이너 페인팅(Vagina Painting)’ 퍼포먼스 덕에 전위예술가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작품 열의가 대단했던 훌륭한 비디오 작가”라고 평했다.

일본 니가타현에서 태어난 구보타는 음악 전공인 백남준과는 달리 도쿄교육대 조소과를 졸업한 미술학도였다. 그는 남편의 작품 활동에 조언하며 서로 큰 영향을 주고받았다. TV들을 입체적으로 쌓아 조형물로 만든 백남준의 ‘비디오 스컬프처(Video Sculpture)’가 대표적 사례다. 백남준은 TV 외부도 치장하면 좋을 거라는 구보타의 충고를 받아들여 작품의 예술성을 높였다고 한다.

백남준과의 결혼 과정은 쉽지 않았다. 구보타는 대학 졸업 후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에 심취한다. 그러던 중 64년 독일에서 활약하다 일본을 찾은 백남준의 공연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고는 새로운 예술을 찾아 뉴욕으로 갔다. 이곳에서 구보타는 이미 플럭서스 운동에 뛰어들어 맹렬하게 활동 중이던 백남준과 운명처럼 재회해 연인이 된다.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졌지만 백남준은 결혼을 기피했다. 그러던 중 자궁암에 걸린 구보타가 수술비가 없어 쩔쩔매자 백남준은 돌연 결혼을 제의, 즉시 식을 올린다. 자신의 건강보험으로 수술비를 대기 위해 결혼했던 것이다.

구보타는 2006년 백남준이 작고한 뒤 남편의 예술세계를 소재로 한 개인전을 여러 곳에서 열었다. 2010년에는 남편과의 사랑과 예술적 교감을 엮은 회고록 『나의 사랑, 백남준』을 국내에서 출간했다.

남정호 논설위원 nam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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